[김한민의 탈인간] 2023년, 멧돼지의 해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제목을 보고 행여나 대통령 풍자 칼럼을 기대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반도를 누비며 숱한 전쟁을 겪고도 매번 재기에 성공한 멧돼지지만, 그들의 포식자(표범, 범, 늑대)를 포함해 웬만한 야생 포유류는 씨를 말리고 산 구석까지 농지·주거지로 개간한 인간에게 완전히 밀려버렸다.
이런 비살상적 방법이야말로 대량 살상 전에 시도했어야 마땅하지 않나? 어찌 됐든 멧돼지는 지금도 어디선가 죽임당하고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한민의 탈인간]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제목을 보고 행여나 대통령 풍자 칼럼을 기대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정치인을 동물에 빗대는 짓도 이제 그만하자. (그것이 어느 쪽에 모욕적인지는 읽어보면 안다.) 멧돼지는 역대 그 어떤 대통령보다 이 나라 생태계에 큰 공헌을 했다. 애국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살던 대로 살다 보니 공동선에 기여한 것이다. 만약 공자에게 생태적 지식이 있었다면 야생동물을 보고 ‘종심소욕불유구’(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도에 어긋남이 없다)란 말을 떠올렸을 법도 하다.
현재 전국에 남은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산림은, 나무에 몸을 비비고 땅을 파고 뿌리·열매를 먹으며 열심히 씨앗을 퍼뜨려온 멧돼지 없이는 불가능했으니, 한마디로 우리 생태계의 필수종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멧돼지의 종자산포 능력은 노루보다 20배나 높다.) 또한 멧돼지는 국내 그 어떤 가문보다도 오래 이 땅에 살아온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 토박이 중의 토박이다. 반도를 누비며 숱한 전쟁을 겪고도 매번 재기에 성공한 멧돼지지만, 그들의 포식자(표범, 범, 늑대)를 포함해 웬만한 야생 포유류는 씨를 말리고 산 구석까지 농지·주거지로 개간한 인간에게 완전히 밀려버렸다. 즉 본래 멧돼지 동산이었던 곳에 인간이 침입한 형국인데, 어쩌다 민가 근처로 오면 “멧돼지의 침범” “재산 피해”를 외치며 적반하장인 줄도 모른다.
감사 표시를 해도 모자랄 멧돼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러한데, 여기까진 그래도 양반이다. 2019년 중국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퍼지며 한반도 멧돼지는 역사상 최대 시련기를 맞는다. 사육돼지에게 옮기면 사망률이 높은 병의 특징 때문에 양돈업계에 비상이 걸린 것. 방역은 과학의 형식을 갖추지만 여론에 좌우된다. 감염된 북한 멧돼지가 남하해 옮았다는 ‘전문가’ 의견들이 흘러나오더니, 어느새 멧돼지가 감염의 주범임은 물론 살해가 유일한 해결책이란 담론이 단단히 자리 잡는다.
멧돼지에서 사육돼지로 옮긴 증거가 없다는 사실, 유통·투기된 돼지고기를 통한 전파 가능성 등은 깨끗이 무시되고, 정부는 전국의 엽사들에게 살상면허를 부여한다. 그렇게 3년간 약 27만마리라는, 헤아리기도 힘든 수의 멧돼지가 죽임당한다. 이는 원 개체 수의 절반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토록 무식한 접근을 인간사에 비유하자면, 마치 코로나19 초기 확산지 대구를 봉쇄한 것도 모자라, 도시인 전부를 잠재 보균자로 간주해 사살한 셈이다. (이 비유가 불편한가? 멧돼지 입장에선 가슴에 박힌 총탄이 좀 더 불편할 것이다.) 이쯤 되면 방역이 아니라 종 청소다. 하지만 양돈업계는 이것도 부족해 멧돼지의 조속한 완전 박멸을 강력히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논란에서 목격했듯, 비교적 단순한 사안도 인과관계 규명은 힘들다. 멀쩡하던 사람이 백신 투여 한시간 뒤 죽어도 백신이 직접 사인인지 증명하긴 매우 어려운 게 인과관계라는 요물이고, 설령 밝혀져도 일반화해 확대 적용하기란 더욱 조심스럽다. 그런데 동물 방역에 관한 사안은 대략적 정황, 느슨한 추측, 빈약한 근거만으로도 수십만의 생명을 학살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런 식으론 전염을 못 막는다고 자인하는 엽사들도 있다. 멧돼지의 이동만 부추겨 병이 더 확산되니, 염분이 모자라 민가로 내려오는 멧돼지의 습성을 고려해 산에 소금을 배치해주면 접근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비살상적 방법이야말로 대량 살상 전에 시도했어야 마땅하지 않나? 어찌 됐든 멧돼지는 지금도 어디선가 죽임당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 올해를 내 멋대로 ‘멧돼지의 해’로 정했다. 혼자라도 매달 멧돼지를 기리며 만나는 이마다 붙잡고 이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동참할 누군가가 있을까?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얼씨구나’ 4%대 예금금리 끌어내린 은행…대출금리는 천정에
- “노력 안하고 극단 선택”…국민 가슴 대못 박는 정부법무공단
- 윤 대통령, 김기현 장남 결혼에 축하전화…‘윤심’의 무게는?
- NH농협 공개 채용, 온라인 필기시험 치르다 서버 다운돼 연기
- 정말, 껍질 깎기 귀찮아서야? 딸기 매출, 사과를 앞질렀다
- “백종원이 하니 잘 되겄쥬?” 고향시장 살리기, 팔 걷은 백셰프
- 봉화 생환 광부, 바다 여행 꿈 이룬다…크루즈 타고 울릉도로
- [단독] “손실보전금 한푼도 없다” 소상공인 사각지대 7만7천명
- 고농도 미세먼지 내일까지 ‘나쁨’…월요일 출근길도 뿌옇다
- 무인기 뚫린 ‘방패’ 고치랬더니…‘창’부터 꺼내든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