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없는 ‘전원일기’를 글로 읽는다[화제의 책]

엄민용 기자 2023. 1. 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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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의 전원일기 표지



많은 K-드라마가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의 국내 인기는 온도차가 심하다. 방영 횟수가 적은 데다 특정 층을 대상으로 한 한계 탓이다. 그런 면에서 1980년부터 2002년까지 1088회 방송되면서 ‘대한민국 역대 TV 드라마 최장수 방영’ 기록을 남긴 ‘전원일기’는 국내 드라마 최고의 걸작이자 단 하나의 ‘국민 드라마’로 불릴 만하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전원일기’는 단순하게 보면 농촌 드라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영되면서 공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이야기와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 시대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각 세대의 갈등과 고충,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인생의 가치와 교훈 등을 작품에 녹여냈다. ‘인간극장’이자 대하드라마다. 특히 정애란, 김혜자, 최불암, 고두심, 김용건, 유인촌, 김수미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들이 물 흐르듯 펼치는 생활 연기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원일기’를 영상이 아닌 글로도 만날 수 있게 돼 관심을 모은다. 최근 3권으로 출판된 ‘차범석의 전원일기’(차범석·전성희 지음 / 태학사)는 한국 최고의 사실주의 극작가 차범석(1924~2006)이 집필한 ‘전원일기’ 1화부터 49화까지 중 42편(4편은 김정수 또는 노경식 집필, 3편은 대본집이 남아 있지 않음)의 대본집이다.

드라마 ‘전원일기’는 세계 방송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장수 드라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화와 27화를 제외하고 초기 100여 편의 영상이 남아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이번 대본집의 가치가 더욱 크다. 김 회장과 그의 가족을 비롯해 일용과 일용네 등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어떻게 설정됐는지를 알 수 있고, 드라마 앞뒤에 김 회장의 내레이션이 들어가는 형식적 포맷 등 ‘전원일기’의 원형적 모습을 이 대본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원일기’는 최초 방영일 기준으로는 42년이 지난 작품이다. 한물갔어도 한참 간 드라마다, 하지만 최근 케이블 채널과 OTT를 중심으로 때아닌 ‘전원일기 열풍’이 불고 있다. 2021년 OTT에서는 인기 드라마 순위 톱10에 오르기도 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요즘 젊은 세대들도 이 드라마를 많이 본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평론가들은 ‘빈티지한 영상과 서사에 대한 뉴트로(newtro)적 매력’이 강하고, 갈등만이 첨예화된 요즘 드라마들과 달리 ‘화해에 초점이 맞춰진 휴먼 드라마’여서 안정감을 주며, ‘몰입을 요하지 않는, 불멍처럼 볼 수 있는 드라마’여서 언제 보아도 좋다는 점 등을 인기 비결로 꼽았다.

전문가들의 분석처럼 ‘전원일기’의 전체 흐름은 잔잔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제5공화국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직후 ‘퇴폐적이고 저속한 사회 분위기를 정화한다’는 명분 아래 방송사에 국민 정서순화 드라마 제작을 강요했고, 그 과정에서 기획된 것이 ‘전원일기’다.

하지만 그 이면에도 또 다른 몸부림도 있었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직후 차범석은 “내 고향 사람들이 죽어가고 쓰러지고, 내 고향 땅이 흔들리고 파이고, 내 고향 산천에 총탄이 쏟아지고 핏자국이 낭자하다는데, 어떻게 우리가 안일하게 연극을 하고 있겠는가”라면서 공연을 모두 취소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차범석에게 이연현 PD가 ‘전원일기’ 집필을 제안했다. ‘인생을 조금은 관조해 왔고, 그 아픔과 깊이를 뚫어보는, 나이든 극작각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차범석을 선택한 이유다. 여기에 차범석도 평소 ‘왜 TV 드라마는 도시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가’와 ‘왜 TV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으로 사랑 타령만 하면서 서민층이나 지역사회와는 담을 쌓는가’라는 불만을 품어 왔던 터여서 ‘전원일기’의 밑그림이 그려지게 됐다.

훗날 차범석은 ‘전원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오늘의 농촌 실상을 도시인에게 보여 주고 잊어져 가는 풍물이나 인정을 되살리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기 위해 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들여다보는 ‘차범석의 전원일기’는 단순한 대본집이 아닌 색다른 글맛을 느끼게 한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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