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보다 훨씬 센 김은숙 작가의 저주('더 글로리')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1. 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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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송혜교가 바둑 같은 복수를 하는 이유

[엔터미디어=정덕현] "바둑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집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에요. 그래서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주여정(이도현)은 문동은(송혜교)에게 처음 바둑을 가르쳐주며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들은 문동은은 늘 무표정했던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맘에 들어요."

문동은이 맘에 든다고 한 건 바둑이라는 게임이 가진 특징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문동은은 바둑이 하는 이 싸움 방식이 맘에 든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지독한 학교폭력을 당했고, 학교도 경찰도 심지어 엄마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가해자 부모의 돈을 받고 합의서를 써준 후 야반도주하듯 집으로 지내던 여인숙 방을 빼고는 떠나버렸다. 엄마가 방 앞에 버리고 간 짐에는 문동은이 읽으며 꿈을 꿨을 건축 관련 책들도 있다. 문동은이 왜 건축의 꿈을 갖게 됐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집이 어떤 의미인지도.

지낼 집도 없이 김밥집에서 김밥 말고 써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문동은에게 '김밥천국'이라 이름 붙여진 가게 이름은 아이러니하다. 목욕탕 청소일을 하고 지독한 생리통과 학교폭력으로 여기 저기 지져진 살갗의 지독한 가려움 속에서 문동은은 생각한다. "약국은 9시에 열고 한강은 20분만 걸으면 된다." 집도 없고 꿈도 사라진 문동은에게 살 희망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지낼 단칸방 하나 없이 추운 밖을 헤매며 하루하루를 버틸 때, 가해자들은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집에서 깔깔 웃으며 살아갔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부모들 덕분에 탈선과 범죄까지 저질렀어도 아무런 상처나 흔적조차 남지 않는 말끔한 삶을 살았고, 잘 나가는 건설회사 대표와 결혼해 토끼 같은 딸을 낳고 잘 살았다. 저들의 집은 늘 굳건하고 따뜻하지만 그들에 의해 짓밟힌 피해자나 약자들은 집도 없이 칼바람을 견뎌내는 삶을 살아간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꿈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문동은에게 '집'의 의미는 이토록 남다르다.

그래서 드라마 시작과 함께 문동은이 학교폭력 가해 주동자였던 박연진(임지연)의 집이 잘 보이는 맞은 편 집으로 이사 오는 장면 역시 '집'에 대한 남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그 곳 옥상에서 박연진의 집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얼굴로 김밥을 물어 베어 먹는 문동은의 모습도 그렇다. 천국 따윈 없는 '김밥천국' 집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던 그 힘은 어쩌면 저 편 단란하게만 보이는 박연진의 집을 부수겠다는 일념이었을 테니 말이다.

<더 글로리>의 복수극에서 집은 그래서 중요하다. 문동은이 취한 복수의 방식이 바둑의 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가는' 그런 방식. 그래서 최근 들어 쏟아져 나온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하는 그 많은 콘텐츠들이 하는 복수의 방식과 <더 글로리>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그저 주먹을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는 복수가 아니라, 서서히 상대를 조여가고 결국 "말라죽게 만드는" 그런 복수의 방식이다.

굳이 내 집을 짓고 남의 집을 부수는 바둑 같은 복수극을 가져온 건, 아마도 김은숙 작가가 이 집이라는 은유를 통해 이 복수극이 그저 사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복수의 의미를 더하고 싶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루지만, 그 안에는 수저로 나뉘는 계급과 그 안에서 극명하게 만들어지는 차별의 폭력을 그리고 있다. 빈부와 강약으로 나뉘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을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의 밑그림으로 그려 넣어 이 문제를 좀 더 양극화된 사회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한 것.

굳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담았던 지상-반지하-지하로 구획되는 계급화된 자본주의의 풍경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집이라는 소재는 이러한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 박연진의 집이 말끔하고 화려하게 꾸려져 있고 그 안에서 사는 이들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그 가해자의 집을 내려다보며 복수를 꿈꾸는 피해자 문동은의 집에서는 아무런 집기조차 없고, 전기, 수도도 쓰지 않는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다. 온통 벽면에 가해자들과 관련된 사진들만 복수의 일념으로 가득 붙여져 있을 뿐이다.

과연 문동은은 자신이 꿈꾼 대로 저들의 집을 서서히 조여 들어가 그들의 추악한 실체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이를 통해 그 집을 부숴버릴 수 있을까. 과연 이러한 복수를 통해 문동은은 집 벽면 가득 채워진 복수의 일념들을 떼어내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자신의 집에 편안히 누울 수 있을까. '영광' 따윈 없을 것만 같은 그 복수극이 어디로 흘러갈지 벌써부터 시즌2가 궁금해진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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