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레전드’의 새로운 귀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마침내, 전설의 귀환이다. 1996년 연재 종료를 알렸던 원작의 마지막 책장이 스크린에서 다시 넘겨진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금껏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슬램덩크》의 이야기를 담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추억은 거들 뿐, 새로운 기록이 시작될 시간이다.
NBA와 마이클 조던. 1990년대는 농구의 시대였다. 그리고 《슬램덩크》가 있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슈에이샤)'에서 연재한 《슬램덩크》는 한국과 일본의 농구 신드롬을 이끈 주역이었다. 나아가 이 작품은 하나의 문화 현상에 가까웠다. 전 세계 1억2000만 부라는 수치부터가 증명한다. 지지부진한 연재 대신 과감한 연재 종료를 선택한 것도 《슬램덩크》를 20세기의 전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북산과 산왕의 전설이 다시 펼쳐진다
이번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그가 처음 극장판 연출을 제안받은 때는 2000년대 초반. 10년이 훌쩍 지난 2014년에야 이를 수락하고 제작에 착수한 이유는 파일럿 영상의 수준이 그제야 그의 성에 찼기 때문이다. 이번 극장판을 만들면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관객들에게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26년 만에 돌아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정공법을 택한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대신 원작의 정수, 가장 '슬램덩크다운 순간'을 다시 불러오기를 택한 것이다. 영화는 원작의 대미를 장식한 북산고와 전국 최강 산왕공고의 인터하이 32강전을 스크린에 재현한다. 그간 TV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다뤄진 적 없는 무대다. 연필 스케치로 서서히 모습이 완성되는 인물들이 한 명씩 걸어 나오는 순간부터, 원작 팬들의 마음에는 제대로 불이 지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인공들의 이름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인 1992년 국내 출간 당시의 심의 규정에 따라 한국식으로 번역을 거친 결과다. 쇼호쿠고등학교는 북산고로, 사쿠라기 하나마치는 강백호로 바뀐 식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자막과 더빙판은 한국식 번역 이름을 그대로 쓴다. 주장 채치수, 3학년 정대만, 2학년 송태섭, 1학년 강백호와 서태웅이 코트 위로 나서 산왕과 경기를 치른다. 이들 각자는 북산고 전체의 팀플레이를 펼치는 동시에 개인적 승부도 맞닥뜨리는 중이다. 채치수는 산왕의 센터 포워드 신현철의 거대한 존재감에 압도되고, 국내 최고의 선수를 꿈꾸는 서태웅은 어떠한 경기 흐름에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경기를 이끄는 산왕의 포인트 가드 이명헌의 침착함에 당황한다.
그중에서도 중심인물은 송태섭이다. 처음에는 조금은 의외의 선택으로 느껴진다. 이제 막 농구를 시작했지만 독특한 천재성을 발휘하는 강백호, "농구가 하고 싶습니다" 등의 명대사를 남긴 전설의 3점 슈터 정대만 등에 비해 원작에서 주목도가 그다지 높은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키나와에서 보내던 유년 시절, 정신적 지주이자 뛰어난 농구 스승이었던 형 준섭을 잃은 태섭의 과거를 경기 중간중간 회상으로 제시한다. 선수로서 불리한 조건인 작은 키를 극복할 자신만의 비기를 만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유망주였던 형의 그늘에서 성장해야 했던 태섭의 사연은 최강 실력자인 산왕을 만난 북산의 경기 흐름과 조응하며 흐른다.
땀방울과 투지가 만드는 스포츠의 세계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으로 송태섭을 선택한 데 대해 "만화를 연재할 때에도 언제나 스토리를 더 그리고 싶은 캐릭터였다"고 말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물을 대하는 그의 관점이 변화한 것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연재 당시 한창 20대를 통과 중이던 그는 신체적 조건이 훌륭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주인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픔을 안고 있거나 그것을 극복한 존재의 관점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교 농구팀을 배경으로 하지만 개인의 서사를 부각하기보다는 코트에서의 뜨거운 승부에 목숨을 건 이들의 패기를 더 중요하게 다뤘던 원작의 방식 덕에, 긴 세월을 건너 돌아온 이야기의 틈에는 이토록 새롭게 스며들 사연이 풍성하다. 원작에서 이미 등장했던 경기가 주는 반가운 익숙함과 숨겨진 사연을 만나는 신선함.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전략은 원작 만화의 그것처럼 신중하고 탁월하다.
언뜻 원작 만화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하나의 콘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슬램덩크》의 한 컷 한 컷에는 경기의 박진감뿐 아니라 드리블 한 번, 흘러내리는 땀방울 하나에도 인물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실어 나르는 듯한 묘사가 담겨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를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서사와 마찬가지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선택은 이번에도 정공법이다. 최근 애니메이션들의 경향처럼 화려한 CG가 돋보이는 연출 대신 만화책을 넘기는 듯한 작화를 그대로 살려낸 움직임을 만든 것이다. 경기 장면에는 3D를 활용한 입체감이 더해지고, 회상 장면들에서는 아날로그 손그림의 정서가 극대화된다.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와 선수들의 클로즈업 등을 적절하게 활용한 125분은 웬만한 실제 농구 중계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고등학생 시절 농구부 주장이었던 작가의 이력도 생생한 작화를 뒷받침한다. 코트에 발을 딛는 방법이나 공을 받는 순간의 신체 반응, 슛하기 전 약간의 타이밍 등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농구다움'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결과다. 엄청난 속도감보다는 정지된 순간의 정적이, 그 안에 흐르는 사유가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너스처럼 일부 등장하는 원작의 명장면과 명대사들의 배치 역시 기대해도 좋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최선을 다해 부딪쳐보는 과정, 무수한 땀방울과 투지가 일궈내는 정직한 결과가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거기엔 '꺾이지 않는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깨끗한 패배와 승리의 쾌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슬램덩크의 세계관, 나아가 스포츠 만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죠?" 다시 찾아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부상을 딛고 코트에 복귀하는 강백호의 뒷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명작의 '영광의 시대'는 결코 저물지 않았다.
《슬램덩크》의 또 다른 버전들
원작의 영상화 작업이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101화에 걸쳐 테레비 아사히 채널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국내에서는 1998~99년 SBS)한 것이 시초. 1994년과 1995년 일본에서는 매해 두 편씩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하기도 했다. 능남고와의 연습 경기부터 정대만의 폭력 사건 사이의 에피소드를 다룬 첫 번째 극장판을 포함해 총 네 편이다.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TV와 이전 극장판 연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스핀오프 단편집 《피어스》와 기획전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등의 방식으로 원작 종료를 아쉬워하는 팬들의 마음을 달래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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