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는 이웃을 지키고 싶었을 뿐

김양진 기자 2023. 1. 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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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전상서]한국을 대표하는 6㎞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6차선 도로 강행한 뒤로 생육 상태 더 나빠져
2023년 1월2일 오후 충북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열악한 생육환경 탓에 특유의 터널형 가로수길이 크게 훼손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양진 기자

충북 청주의 가로수길은 높이 10m가 넘는 플라타너스 고목 1천여 그루가 웅장하고 긴 터널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로수길은 우암산, 무심천과 함께 ‘청주 3대 랜드마크’로 꼽힌다. 영화 <만추>(1981년)나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의 한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한여름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쭉쭉 뻗어 맞닿고 커다란 잎사귀들이 너른 그늘을 만들어낸다. 한낮에도 가로수길에 들어서면 어둑어둑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에 가로수가 있는 길이 많지만 ‘가로수길’이라고 하면 이곳을 일컫는다. 청주 시내 죽천교에서 조치원 방향으로 나가는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까지 이르는 6㎞ 구간이다.(지도 참조)

여러 번의 주민 탄원으로 키운 나무

“터널이 다 뭡니까? 이제는 (나무들이) 온전한 구간이 별로 없습니다. 가로수길 도로확장공사, 제2, 제3 순환로 교차로 설치 과정에서 나무를 옮겨심다가 수백 그루가 죽었어요. 인구가 늘고 교통량이 많아지고 도시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나무의 생육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있어요.”

2023년 1월2일 오후 2시간가량 가로수길을 함께 둘러본 뒤, 염우 사단법인 풀꿈환경재단 상임이사가 육교 위에서 가로수길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랫동안 청주에서 환경운동을 해왔다.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건 그 나라나 도시의 품격을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관리를 못해서 고목들이 고사해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합니다. (예전엔)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었잖아요. 큰 나무를 베면 사람이 죽는다고 나무를 아끼던 나라인데, 가로수길에 처음 심은 70~80살 고목이 몇 그루 남았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로수를 생명이 아닌 시설물로 보는 거죠. 그런 낙후된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지금의 가로수길은 1952년 만들어졌다. 청원군 강서면(현재 청주시 흥덕구 강서1·2동) 면장이던 홍재봉(2007년 작고)씨와 주민들이 정부의 녹화사업 지원을 받아 황량한 비포장길에 키 1m가량의 어린 플라타너스 묘목 1600여 그루를 심었다. ‘당시 가로수길에 소 장수들이 많이 다녔고, 소에 붙은 파리떼를 쫓으려고 플라타너스를 꺾어 회초리로 사용하는 바람에 온전한 게 없었다. 인근 학교 학생들이 나무를 꺾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무를 자식처럼 아껴달라고 호소했다. 어린이들 이름을 적은 명찰을 나무마다 걸어뒀더니 플라타너스들이 제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했다.’(2000년 한 지역언론에 실린 홍재봉씨의 회고)

1970년대 초 청주진입도로를 2차로에서 4차로로 늘리는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가로수가 모조리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다. 홍씨와 주민들은 탄원을 거듭 제기했다. 다행히 벌목 대신 옮겨심기로 공사 계획이 변경됐다. 다만 이때부터 가로수길엔 사람 대신 주로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2023년 1월2일 충북 청주 가로수길의 한 플라타너스에 달린 방울 모양 열매들. 열매 하나에 씨 500~600개가 달렸는데, 겨울부터 봄까지 땅에 떨어지면 방울 모양 껍질이 깨져 씨앗이 바람을 타고 퍼진다. 김양진 기자
청주 가로수길 눈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의 열매. 이 열매의 모양을 보고 중국·일본·북한 등에선 플라타너스를 ‘방울나무’라고 부른다. 김양진 기자

숲길 약속 엎어버리고 도로 만든 지자체장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길고(6㎞) 가장 큰 규모(청주시 집계 약 1400그루)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다. 가로수길을 둘러보니, 사람 두셋이 양팔을 벌려도 손끝이 닿지 않는 정도로 둘레가 긴 거목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성했던 잎이 걷힌 겨울이라, 깊고 오래된 상처들이 눈에 잘 띄었다. ‘청주 가로수길’ 표지석이 서 있는 죽천교 입구 쪽 첫 나무부터 ‘두절’(머리를 쳐내듯 줄기만 남기고 모든 가지를 제거)된 나무였다. 고사한 뒤 베여 남은 밑동들, 새로 심긴 듯 불안하게 서 있는 가녀린 어린나무들까지 보였다. 청주시 담당자는 “(나무들이) 워낙 노령이라서 고사한 게 많았고, 너무 커서 사고도 잦아 (수형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고사목은 건강한 나무로 대체하고 있다”고 말했다.

팔팔했던 플라타너스들이 떼로 고사하거나 심하게 부패하는 등 이상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나무 생육을 고려하지 않은 복토 등 도로 관리, 폭 1~2m에 불과할 정도로 좁은 뿌리 쪽 생육공간 등이 원인이었다. 실제 2002년 청주시 조사에서 가로수길 플라타너스의 22.3%가 ‘생육 불량’이었다.

1999년 청주시는 가로수길 확장계획(4차로→8차로)과 함께 전체 가로수의 63%를 다시 옮겨심겠다고 발표했다. ‘가로수 보전’은 지역 최대 현안 중 하나로 떠올랐다. 6년간의 갈등 끝에 2005년 9월 청주시는 시민단체들과 합의해, 가로수길 가운데 약 4㎞ 구간의 기존 4차로를 숲길(녹지공원)로 조성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대신 공원 양옆으로 3차로씩 새로 놓기로 했다. 나무도 살리고 도로도 확장하는 절충안이었다. 하지만 2006년 청주시장이 바뀌었고, 새로 부임한 시장은 ‘중앙 숲길로 이동할 때 시민 안전이 우려된다’며 이미 30% 정도 진행된 공사를 중단하고 숲길 조성 계획을 백지화했다. 40여 개 시민단체가 항의·농성·성명발표 등으로 반발했지만 시장의 결심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현재 6차로 가로수길의 골격은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청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이던 박창재 세종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특별한 길이니까 나무도 함께 살리는 숲길을 만들자고 했던 것인데, 당시 청주시는 합의를 파기해 차량 흐름만 중시하는 ‘일반적인’ 도로 공급 정책으로 돌아섰다. 가장자리에 보도를 만들면 (가운데 숲길 조성과) 똑같다고 막무가내였다”고 말했다. 이성우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가로수를 ‘전깃줄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라고 보는 인식이 강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로 공론화가 부족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며 “지금은 가로수를 시민들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기후위기·탄소중립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그때만 해도 시민사회 내부적으로도 ‘가로수? 이게 환경운동인가?’라는 말이 나올 때였다”고 설명했다.

2007년 시민단체들과의 합의를 파기했을 때 청주시는 ‘플라타너스는 유해분진 때문에 공원용으로는 이용하지 않는 나무’라는 내용의 자료도 냈다. ‘유해분진’이란 봄철 플라타너스 잎 뒷면에 붙었던 털이 떨어져 날리는 걸 의미한다. 기침·재채기 등을 유발한다. 하지만 봄철 호흡기 문제를 일으키는 다른 꽃가루들을 모두 유해분진이라고 비난하진 않는다. 더구나 플라타너스는 어른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넓은 잎으로 활발한 광합성 작용을 일으켜 다른 나무들보다 탄소 고정 능력이 뛰어나다.

2023년 1월2일 염우 사단법인 풀꿈환경재단 상임이사가 청주 가로수길에서 플라타너스 고목의 둘레를 재보고 있다. 김양진 기자
플라타너스 껍질들. 껍질이 벗겨지는 모양새를 보고 피부병인 ‘버짐’이 들어간 ‘버즘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학계에선 실제와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이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양진 기자

넓은 잎, 방울열매 갖고 있지만 이름은 ‘버즘’

국립산림과학원이 2004년 펴낸 ‘플라타너스의 공해물질 정화기능’ 자료를 보면, 플라타너스는 매일 이산화탄소 3.6㎏을 흡수하고 산소 2.6㎏을 방출하는 등 대기 정화 능력이 은행나무의 5.5배, 느티나무의 3.5배에 이른다. 또 활발한 증산작용으로 도심 열섬을 누그러뜨린다. 이런 효용성 때문에 플라타너스는 전세계 주요 대도시의 숲 조성에 널리 쓰이는 나무 중 하나다.

최진우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전문위원은 “(한국에선) 자동차 위주의 도시계획으로 가로수가 오래 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심지어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수종 갱신’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나무를 아무렇게나 벌목하고 이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뉴욕시는 5년마다 시민들과 함께 가로수를 전수조사해 ‘나무지도’(Tree Map)를 제작한다. 플라타너스는 뉴욕시 전체 가로수·공원수 가운데 가장 많은 9.7%(8만3788그루)를 차지한다. △빗물 차단 △에너지 절약 △대기 오염물질 제거 등 플라타너스의 환경적 가치가 연간 3130만달러(약 399억원)에 이를 것으로 뉴욕시는 추정한다. 가로수의 수령·크기조차 관리하지 않는 한국 도시들과 가로수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원이 다르다.

라틴어 이름인 ‘플라타너스’나 영어 이름인 ‘플레인트리’(Plane-tree)는 모두 ‘넓다’ ‘풍부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플라티스(Platys)가 어원으로, 잎 모양에서 딴 이름이다. 중국 이름 ‘현령목’(懸鈴木)이나 일본 이름 ‘영현목’(鈴懸木)은 열매에서 땄다. 작은 열매 500~600개가 촘촘하게 모여 구슬(방울) 모양의 집합과를 이루고, 겨울에서 봄까지 이 ‘구슬’이 땅에 떨어져 깨지면 낱낱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퍼진다. 북한 이름도 ‘방울나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이름은 애석하게도 ‘버즘나무’다. 또 다른 푸대접이다. 수피의 벗겨진 모양을 보고 피부병인 ‘버짐’의 강원도 방언 ‘버즘’에서 따왔다고 한다. 얼룩진 수피 모양이 유사한 육박나무는 군복 무늬 같다며 ‘해병대 나무’라는 애칭이 붙었다. 첫 현대식 식물분류 목록집인 <조선식물향명집>(1937년) 속 플라타너스의 이름은 ‘풀라탄나무’다.

2007년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지키기 위해 모인 시민들.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제공
2007년 여름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우거진 잎사귀가 터널을 이뤘다.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제공

플라타너스 아래 의학이 자라지만

“얼핏 버즘처럼 보인다고 해서 버즘나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나 조금은 속되고 좀은 생억지를 부려보는 호칭 같아서 나 개인으로는 그 이름에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 임학계 거목인 임경빈(2005년 작고)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5년 <조경지> 1·2월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플라타너스가 삭막한 도시에서도 잘 자라는 건 베툴린 등 상처 치유 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과학자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29권에 ‘플라타너스의 25가지 치료법’을 적어놓았다. 나무껍질을 식초에 달인 것은 시린 이를 치료하고, 잎을 백포도주에 끓여 마시면 눈에 좋다는 대목 등이 나온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플라타너스의 후계목으로 여겨지는 500살 된 나무는 지금도 ‘히포크라테스 나무’라고 불리며 그리스 코스섬에서 자라고 있다. 전세계 유명 의과대학에선 이 후계목의 후계목을 분양받아 귀하게 키운다.

플라타너스는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1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김현승의 ‘플라타너스’)

청주(충북)=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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