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울다 지쳐 꽃잎 빨갛게 멍든’ 이미자의 동백꽃[정충신의 꽃·나무 카페]
■ 정충신의 꽃·나무 카페 - 동백꽃
송창식·정태춘의 노래속 선운사 동백꽃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엄동설한 雪中동백 비장미의 地中동백 두 번 피는 꽃
카멜이 서양에 전한 ‘까멜리아’…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샤넬의 상징
중국은 ‘海紅花’, 일본은 ‘椿姬’…동백은 한국산, 애기동백은 일본산
글·사진=정충신 선임기자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예요∼>
1990년 송창식 골든 제3집에 등장한 송창식 작사·작곡·노래 ‘선운사’다. 송창식의 ‘선운사’도 고려속요 ‘가시리’처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다. ‘동백 꽃은 두 번 핀다’는 말이 있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한 번. 대개의 꽃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데 비해 동백꽃은 꽃송이가 ‘모가지째 통째로 뚝뚝 떨어진다’. 송창식은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 했다.
동백꽃은 통꽃이다. 꽃이 질 때 시들지 않은 붉은 꽃봉오리가 통째로 툭 소리 내며 떨어진다. 중국 시인 소식(蘇軾)은 동백꽃은 “불꽃같은 붉은 꽃이 눈 속에서 핀다”라고 표현했는데, 동백꽃은 질 때 빛깔과 모양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본래의 모양 그대로 뚝 떨어져 내린다는 의미다. 동백의 으뜸은 ‘설중동백(雪中冬栢)’이라지만 봄비가 촉촉히 내려 언땅을 녹이고 바람 부는 초봄 땅을 붉게 물들이는 ‘지중동백(地中冬栢)’이 더 낫다고도들 한다. 처절한 피빛 낙화의 비장미(悲壯美) 때문일 게다.
동백꽃의 낙화는 망나니의 칼날에 목이 댕강 떨어지는 참수(斬首)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일본에서는 동백을 ‘사무라이의 꽃’ 이라 했다. 무사의 목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사무라이들이 꺼렸던 꽃이다. 우리나라에서 동백나무는 마귀를 막는 힘을 가진 식물로 여겨 ‘길상(吉祥)의 나무’라 취급했다. 남부 지방에선 사철 푸르고 윤기나는 동백잎처럼 변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뜻으로 혼례식 초례상에 동백나무를 꽂기도 했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돼 있는 전북 고창 아산면 삼인리의 선운사(禪雲寺) 동백숲은 절 입구 오른쪽 비탈부터 시작돼 절 뒷산까지 5000여 평에 500∼6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동백나무 3000여 그루 군락이 절을 수호하듯 자란다. 동백은 주로 겨울이 따뜻한 남쪽지방 섬지역에 잘 자라고 동쪽의 울릉도와 서쪽의 대청도까지 분포돼 있다. 육지로는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춘장대, 내륙으로는 전북 고창의 선운사에 자라는 것들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동백나무(Camellia)는 쌍떡잎식물로 물레나무목 차나무과의 상록활엽 소교목이다. 동백의 원산지는 우리나라이다. 중국 명나라 약학자인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해홍화 출신라국(海紅花 出新羅國)’이라는 기록이 있다. 해홍화는 동백꽃의 중국식 이름이다. 동백꽃은 신라에서 왔다는 뜻이다.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 시집에는 “해홍화(海紅花)는 신라에서 들어왔는데 귀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중국 식물 이름에 접미사 ‘해(海)’는 바다를 건너온 수입식물을 지칭한다.
동백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자란다.일본의 동백 사랑은 남다르다. 겹꽃 홑꽃 등 600여 종에 달하는 품종에서 상당수가 그들에 의해 육성됐다. 동백나무속 식물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 외 지역에서는 대부분 멸종위기에 처해 있을 만큼 매우 희귀하다. 가장 동아시아적인 나무가 은행나무라면 가장 동남아시아적인 꽃은 동백꽃이라고 한다.
우리 고유의 꽃 동백은 시와 소설 등 우리 문학의 소재로, 영화 드라마 가요의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동백 시와 영화가 가요로 불리고, 장르의 벽을 넘어 주거나받거니 하면서 ‘동백꽃’은 우리 고유의 ‘동백 문화’를 싹틔웠다.
송창식의 ‘선운사’는 미당(未堂) 서정주가 노래한 선운사 동백꽃에 영감을 받은 듯하다.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서정주의 이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로 잘 알려진 선운사 동백꽃은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로 이어진다. 선운사 동백꽃은 정태춘 작사·작곡·노래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길래’에서 절정을 이룬다.< 어디 숨어 무엇들 허는고?/껄껄껄 나아 허어 허어 허어얼∼>로 시작하는, 불교 진언(眞言)과 목탁소리가 삽입된 파격적인 가요는 송창식 동백꽃의 토속적·서정적 향취와는 다른, 오묘한 선(禪)적 풍취가 물씬 우려난다.
동백꽃 하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빼놓을 수 없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한 악곡을 뜻한다. 1964년 소설가 추식이 쓴 방송 드라마 ‘동백 아가씨’가 동아방송 라디오 전파를 탄 뒤 인고의 세월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주인공에 대한 여성 청취자들의 연민이 쏟아졌고, 신성일-엄앵란 주연, 김기 감독의 영화로 다시 태어난다. 백영호 작곡 한산도(본명 한철웅) 작사로 나온 영화주제가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동백 꽃잎에 새겨진 사연/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이 ‘동백 아가씨’ 가사는 중학시절 부상으로 축구선수와 가수의 꿈이 좌절된 뒤 실의에 빠졌던 한산도의 슬픔과 아픔이 녹아있다. 1964년 노래 취입 당시 만삭의 몸이었던 이미자가 당시 열악하기 짝이 없던 지구레코드사 음반 녹음실에서 취입한 이 노래가 애절한 음색의 목소리에 실려 나오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미자 전성시대를 열었다. 당시 ‘동백아가씨’는 방송 차트에서 33주 동안 1위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노래에 왜색이 있다며 금지곡이 됐다가 22년 만에 해금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동백을 뜻한 일본말 ‘춘희(椿姬)’가 ‘동백 아가씨’쯤으로 번역되는데, 금지곡이 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로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돌파한 여성 가수인 이미자를 누군가 시기했기 때문이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동백꽃은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핀다. 추운 겨울에 홀로 피어 눈을 이고 피는 꽃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꽃. 꿀이 많은 꽃이지만 겨울철에는 수분(受粉)을 도와줄 벌과 나비가 드물기에 강렬한 꽃의 색으로 동박새나 직박구리를 유인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드문 조매화(鳥媒花)이다.
동백 하면 종교의 벽을 넘은 다산 정약용과 남도답사일번지 전남 강진 백련사 혜장스님 교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두분의 진한 우정이 배어있는 다산초당과 백련사 15㎞ 코스는 우리나라 최대 동백 야생 숲이다. 다산이 유배 생활 10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강진만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그가 기거했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다산이 혜장스님을 만나기 위해 오가던 사색의 길이다. 길이 800m이며 도보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어우러진 이 산책 코스에 동백꽃이 붉은 융단 카펫처럼 깔린 모습은 장관이다.제주 섬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라고 했다. 엄동설한을 견디고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꽃에 대한 다산과 추사의 사랑은 남달랐던 것 같다.
동백은 서양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동백은 예수회 선교사인 카멜(Kamell)에 의해 18세기말 유럽에 전해졌다. 동백의 학명 카멜리아(Camellia)는 선교사 카멜을 기린다.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샤넬의 상징이 바로 ‘까멜리아, 즉 동백꽃’이다. 샤넬의 검은색 포장상자에 흰 꽃장식이 바로 동백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탄생한다. 라트라비아타는 ‘방황하는 여자’‘버림받은 여자’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을 거쳐 춘희(椿姬)로 번역돼 있다. ‘춘(椿)’자는 일본에서는 동백을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죽나무’를 뜻하므로 일본식 번역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동백나무 꽃말은 ‘매력’이다. 동백꽃도 색상에 따라 다양한 꽃말이 있다. 빨강은 열정·애타는 사랑·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분홍은 갈망·겸손한 사랑, 흰색은 순결·완벽·비밀스러운 사랑 등이 있다.
동백꽃의 친척뻘인 애기동백나무는 일본산으로 산다화(山茶花)로 불리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많이 퍼졌다. 동백꽃은 꽃잎이 반쯤 벌어지지만 애기동백꽃은 꽃이 거의 수평으로 펼쳐져 활짝 벌어진다고 한다. 동백꽃은 통째로 떨어지지만 애기동백꽃은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고, 애기동백은 잎 뒷면의 맥과 씨방에 털이 있는 점도 차이점이다.
동백은 개량종이 무척 많고 색상 분류도 흔히 떠올리는 홍백 동백 말고도 분홍 동백, 줄무늬 동백 등으로 다양하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잎이 두껍고 반짝거리며, 어린잎의 경우 특히 연두빛이 좀 섞인 맑은 녹색으로 빛난다. 꽃, 잎, 열매 모두가 유용한 성분들과 약효성분들이 많아 버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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