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푸틴 인사들의 연쇄 죽음 ‘러시아 급사 신드롬’
우크라이나 전쟁에 비판적인 인사들 많아
(시사저널=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지난 연말 인도에서 발생한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재벌)와 그 친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 세계가 2022년 한 해 벌어졌던 '러시아 기업인 연쇄 의문사'를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인도의 영어신문인 '타임스 오브 인디아'와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2일과 24일 동부 오리샤주 라야가다의 '사이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비데노프(61)와 그의 친구로 올리가르히인 파벨 안토프(65)가 각각 숨졌다.
일행은 지난해 12월21일 밤새 술을 마셨는데 비데노프는 다음 날 아침 호텔 1층에서 빈 와인병에 둘러싸여 의식을 잃은 채 발견돼 곧 숨졌다. 비데노프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됐지만, 문제는 그가 그 전까지 관련 질환을 앓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안토프는 이틀 뒤인 12월24일 호텔과 공사 중인 옆 건물 사이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현지 경찰은 옥상에서 추락한 것으로 추정했다. 안토프는 러시아의 육가공·소시지 업체인 블라디미르스키 스탄다르트의 창업주로 2019년 포브스 추정 자산 1억4000만 달러(약 1780억원)의 부호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소도시 블라디미르의 지방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주목받는 이유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안토프의 비판적인 시각이다. 그는 지난해 6월 SNS에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이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을 거론하다 "테러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이를 삭제하고, 이를 "불행이며 오해이고, 기술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암살이 일종의 정치적 전통으로 이어져
더욱 문제는 이런 미스터리한 죽음이 지난 한 해 동안 러시아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에서 크렘린과 관련 있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분야의 주요 인물이 연쇄 의문사하는 현상을 처음으로 지적한 것은 지난해 4월24일 폴란드의 비영리 지정학·국제관계 싱크탱크인 '바르샤바연구소(WI)'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그 직후인 4월27일 이를 다루면서 사건은 서방에도 알려졌다. 독일의 공영 영어방송인 '도이체벨레(DW·독일의 소리)'도 5월7일 '러시아 올리가르히들, 의문의 연쇄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다뤘다. 지난해 12월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은 이런 현상을 '러시아 급사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푸틴 시대 들어 러시아에선 반(反)푸틴 성향 인물에 대한 암살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왔다는 지적이다. 미국 USA투데이는 '러시아에선 이미 2014년부터 2017년 사이에 크렘린과 가까운 러시아 비즈니스맨과 올리가르히 38명이 의문스럽거나 수상한 상황에서 사망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인 암살로는 주지사와 제1부총리 출신 반푸틴 정치인인 보리스 넴초프가 2015년 2월 모스크바 중심지인 크렘린 근처에서 저녁 시간에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넴초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개입에 반대해 왔다. 2020년 8월엔 야권 정치인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노비촉 중독으로 의심되는 증세를 보였지만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
사실 독재자 스탈린 이후 소련과 러시아에선 암살이 일종의 정치적 전통으로 이어졌다. 소련 비밀공작 기관에선 암살을 '능동적 시책'이라는 뜻의 '악티브니 메로프리야차'로 불러왔다. 암살 수법은 독살과 총격, '창문으로 던지기', 자살 위장 등 다양하다. 장소도 러시아 국내외를 막론한다. 암살 전문 부대가 활동한다는 추정도 있다. 추운 나라에서 벌이는 암살 공작의 최상층에는 당연히 최고 권력자의 은밀한 지시나 의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비즈니스맨 중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어떠한 상황에서 죽어갔을까. 여러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해 의문사한 러시아 비즈니스맨은 최소 24명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하필 푸틴의 크렘린과 관련 있는 에너지나 기술, 방위산업, 미디어 분야에 희생자가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주요 인물들의 면면과 사망 정황이다.
일가족이 함께 숨진 채 발견되기도
2022년 러시아 비즈니스맨 연쇄 의문사의 첫 희생자로는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수송 부문 책임자 레오니트 슐만(60)이 꼽힌다. 슐만은 레닌그라드주에 있는 저택의 목욕탕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곁에서 유서가 발견됐다. 2월에는 가스프롬의 고위 간부인 알렉산데르 튤라코프(61)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거단지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곁에 유서가 있었다. 유서는 자살의 유력한 증거지만,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같은 달 전 니즈니노브고르드주 부지사로 극동북극개발공사(KRDV) CEO인 이고르 노소프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3월에는 의료기기 업체인 메드스톰의 CEO인 바실리 멜니코프(43)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50km쯤 떨어진 니즈니노브고르드의 집에서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4월에는 가스프롬에 이어 러시아 2위 가스 생산업체인 노바테크의 CEO를 지낸 세르게이 프로토세냐(55)가 스페인 저택의 난간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부인과 딸은 침대에서 무딘 도끼에 여러 차례 타격당하고 칼에 찔려 숨져 있었다. 같은 달에는 가스프롬이 설립한 에너지 분야 금융사인 가스프롬은행의 블라디미르 아야예프 전 부회장(51)이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부인과 13세 딸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국영 석유회사인 루코일의 이사인 알렉산데르 수보틴(31)은 5월 모스크바 동북부 소도시인 미티슈치에서 샤먼(무당)을 만나 의식을 치르던 중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보도됐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수보틴은 재산 순위 러시아 7위인 올리가르히다.
7월에는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아스트라쉬핑의 대표이사인 유리 보로노프(61)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택 풀장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됐으며, 그 옆에 권총이 있었다. 8월에는 푸틴을 공공연히 비난해온 라트비아 태생의 러시아 사업가인 단 라포포르트(52)가 미국 워싱턴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9월1일 러시아 석유회사인 루코일 회장으로 푸틴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라빌 마가노프(67)가 심장 문제로 모스크바 크렘린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내려 숨졌다. 9월10일에는 러시아 극동·북극개발공사(KRDV)의 항공 분야 총책임자인 이반 페초린(39)이 극동 블라디보스톡 인근 해안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고속으로 달리던 모터보트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고 하니 사망 정황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9월14일에는 국영 신문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편집인인 블라디미르 순고르킨(68)이 극동지역 하바롭스크에서 질식사했다.
하나하나 특이한 사건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푸틴의 정치적인 생명이 걸린 우크라이나 전쟁 중 이에 비판적인 러시아 비즈니스맨의 사망이 얼마나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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