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나고 녹슬고 깨져도 유물은 빛난다…우리도 그렇다" [조재현의 조명]
"자유로운 시선으로 차분히 보면, 유물 진면목 보여"
[편집자주] 조명(照明). '광선으로 밝게 비추거나 무대의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빛을 비춘다'는 의미입니다. 또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양한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묵묵히 제 몫을 하는 문화·예술인들 모두 조명받을 이유는 충분하니까요.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애싱턴 그룹'. 1930년대 영국 동북부 탄광지대 애싱턴에서 활약한 광부 화가 집단.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 '광부화가들'은 애싱턴 그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출발은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연 미술 감상수업. 지금 돈으로 40만원 남짓한 주급을 받던 광부들은 궁금했다. 예술에 대해 방귀깨나 뀐다는 상류층이 향유하는 그림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그래서 강사 라이언에게 묻는다. 그러나 라이언은 이렇게 답한다.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알아듣기 힘든 설명에 광부들은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뭔가 의미 있는 그림을 보여달라."
여기 연극 '광부화가들'의 수업에 강사로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백자 달항아리 허리춤에 남은 불그스름한 흔적을 보고는 바람이 매서운 겨울, 집 밖을 한참 걸은 탓에 콧등부터 볼까지 빨갛게 얼어붙은 어릴 적 친구를 떠올리는 사람. 눈 내린 절벽에서 하염없이 매화를 바라보는 선비를 그린 '설루상매도'(雪樓賞梅圖)에선 오직 눈 속에 핀 매화와만 가까운 인물을 통해 되레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숨은 의미 찾기보단 진짜 작품을 즐기는 법을 알려줄 '실전반' 강사 정도로 탁월하지 않을까.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이자 책 '박물관을 쓰는 직업'을 펴낸 신지은(37)씨다.
◇ "낯선 곳을 여행하듯 둘러보세요…차분하게"
책을 읽다 보면 무릎을 '탁' 칠 때가 여러 번이다. 지나치거나 부담스럽기는커녕, 쉬우면서도 포근함이 차고 넘치는 유물 감상평 덕이다. '○○시대 □□양식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라거나 '△△기법이 사용돼 학술적 가치가 크다' 등 하품을 유발하는 설명과는 거리가 꽤 있어 자꾸만 눈이 간다. '박물관에서 일하려면 이 정도 식견은 기본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놓치거나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운 것들을 나긋하게 알려주는 느낌이다. 신 연구원이 한 일간지에 연재 중인 칼럼의 분위기도 이와 유사하다. 한데 그는 전시를 기획하고 소개하는 큐레이터나 학예사는 아니다. 신 연구원은 전시와 소장품을 소개하는 짧은 글들을 매만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메일링 서비스 '아침 행복이 똑똑'이 그의 손을 거치는 대표 업무 중 하나다.
대학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덕에 그만한 지식을 갖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 5일을 박물관에서 머문다고 절로 이런 감상이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신 연구원은 기자의 칭찬에 방싯 웃었다.
유물을 어떻게 봐야 더 재밌을까. 신 연구원은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의 마음으로 보는 걸 추천한다"고 했다. 모든 게 새로울 테니 일단 접해보라는 것이다. 전시 이름부터 살피는 것은 좋은 출발이다. '왜 이 계절에 열렸지'라는 의문을 품는 것도 좋은 흐름이다. 신 연구원의 설명을 빌리자면 전시 포스터 디자인도 그냥 지나치면 아깝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일단 거실에 앉아 집 전체를 쭉 한번 둘러보게 되잖아요. 전시를 볼 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다운 것'에서 멀어지면 훨씬 자유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답니다."
실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막막할 때가 있다. 정작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헷갈린다. 이때 스치는 생각 하나. '정답은 없어, 그저 느껴지는 대로'. 눈을 부릅뜬다. 달리 보일까 싶어 한 발 떨어져 보기도 하고, 허리를 굽혀 올려다보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렵다.
수많은 관람객과 동선이 겹치는데도 전시물을 다 섭렵하겠다는 마음마저 차오른다. 인스타그램 업로드용 사진 촬영도 필요하다. 작은 틈을 파고든 욕심은 커져만 간다. 이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해변에 써놓은 이름을 파도가 쉬이 휩쓸어가듯, 간직하고 싶었던 '감상'이 슬며시 떠나는 순간이다.
신 연구원도 이를 잘 안다. 그래도 여유를 강조했다. 마음을 잡아당기는 게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보자는 것이다.
"처음에 어떤 인상이 떠오르면 한번 쫓아가 보는 거예요. 내가 왜 이렇게 느꼈지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 '앞 유물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왜 기획자는 이런 순서로 유물을 배열했을까' 등의 생각도 좋아요. 내 옆엔 없지만 큐레이터, 유물을 만든 장인과 질의응답을 하는 식으로 전시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웃음)"
이런 과정에 일단 익숙해지는 게 좋다. "잘 모르는 전시여도 기획자의 권유대로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내키는 대로 설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눈에 걸리는 뭔가가 있을지 몰라요." ◇ 어딘가 부족해 보여 더 멋진 유물…"완벽하지 않은 우리도 그렇다"
신 연구원을 사로잡는 유물은 좀 특별하다. 다소 모자란 맛이 있는 것들이다. 그의 책 '박물관을 쓰는 직업'엔 이런 유물이 다수 등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백자 달항아리가 대표적이다. 생긴 모양이 달덩이처럼 둥그렇고 원만해 붙은 이름이다.
다만 한쪽 어깨가 조금 느슨하게 내려앉았고, 위아래를 따로 붙여 만든 탓에 말끔하지 않은 이음매가 또렷하다. 근데 그게 매력이란다. 그는 책에도 이런 달항아리에 '마성'이 있다고 썼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부드러운 여유를 선물해서다. 붕어빵에 바삭한 가장자리가 많으면 신이 나듯 덜 다듬은 이음매가 되레 고소함을 더해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국 공예품을 보면 삼국시대나 고려 때나 완벽하게 마감을 안 해요. 발견을 못 한 건 아닌 것 같고 일부로 그런 거예요.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죠. 당시 장인들을 모셔놓고 질문을 해보는 거예요.(웃음) 완벽하지 않은 유물을 보면 왜 그렇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
신 연구원은 유물 자체가 아닌 그 너머의 것에 집중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다 물건을 만든 이들이 남긴 '마음'을 발견할 때면 희열을 느낀다. 마음이란 '손의 흔적'이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만들고 그렸기에 어딘가 말끔하지 않고 부족하다 싶은 것들 말이다. 여기에 그 물건을 사용하고,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도 더해진다고 그는 믿는다. 신 연구원이 유물을 볼 때 자연스레 사람을 떠올리는 이유다. 책 '박물관을 쓰는 직업'엔 이런 생각이 켜켜이 담겼다.
"유물들이 저마다 품은 시간을 바라보며 그런 시간을 견뎌낸 것들만이 변화했다는 걸 배워요. 우리가 살아가고 일을 해나가는 시간도 미완과 불완전의 연속 같지만, 오로지 그걸 계속할 때만 조금씩 나아가고 변화할 수 있듯이요. 완성되지 않은 자기 자신, 완료되지 않은 목표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면 조금 더 행복할 것 같아요.
이쯤에서 그가 책을 낸 이유를 짐작해 본다. 국보나 보물 같은 수식어만으로 유물의 가치를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을 돌아보며 가치를 발견해보자는 응원 같은 게 아닐까.
"완벽한 모습이든, 좀 못생겼든, 금이 가고 흠집이 났든, 녹슬고 깨졌든 유물은 그 자체로서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것들이잖아요. 그런 유물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나 모자람을 숨기지 않고 나로서 존재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곤 합니다." ◇ 유물 얼굴을 바꾸는 조명…내게 비춘다면 "비스듬하게"
지난해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청자실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핵심은 몰입형 감상 공간인 '고려비색'.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취색을 띤 절정기의 고려청자가 모인 곳이다. 그중에서도 국보 5점은 각자의 전시대에서 각기 다른 조명을 받는다. 조도는 유물에 맞춰 달리 설정됐다. 조명은 비색청자가 그 형태와 색을 온전히 뽐내도록 돕는다. 조명의 힘이다.
신 연구원에게 물었다. 본인에게 조명을 비춘다면 어디에 서겠느냐고. 비스듬하게 반쪽만 내보이고 싶다고 했다. "그림자를 곁눈질하면서 제게 주어진 빛이 어디서 떨어지는지 가늠해보고 싶어요. 유물도 조금 비스듬한 쪽에 서서 보면 정면과는 다른 재미난 것들이 보이거든요. 저도 비스듬하게 보면 더 새롭고 흥미로운 사람일지도 몰라요."
독자를 위한 작은 선물. 추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물을 추천받았다. 신 연구원은 '정말 좋아하고 바라던 것이 내게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힘 빠질 때' 보면 좋은 작품을 보내왔다. 조선 후기 화가인 심사정이 그린 '설중탐매도'다.
"'탐매도'(探梅圖)는 눈 덮인 한겨울에 매화를 찾으러 나선 선비를 그린 그림이에요. 조금 기다리면 편하게 꽃구경을 할 수 있는 봄이 올 텐데 왜 굳이 힘들게 찾아다닐까 싶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좋아하니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내 눈앞까지 올 시간을 참지 못하고 추위 속으로 나가고 마는 거죠. 왠지 옛날 사람들은 그런 거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참으라고만 할 것 같은데 의외죠. 그 먼 옛날에도 사람들은 좋아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힘이 센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연극 '광부화가들'. 계속된 광부들의 '그림 속 의미' 타령에 라이언은 말한다.
"그림 속에 비밀 같은 건 없습니다. 그 점이 중요해요. 여러분 눈앞에 있는 게 다예요. 이해해야 할 건 없어요. 중요한 건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는가입니다. 그림의 의미는 그림에 있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한테 있는 겁니다."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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