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사회, 얼마나 빨리갈지보다 어디로 향할지가 중요"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지식·학습 콘텐츠 브랜드 키플랫폼(K.E.Y. PLATFORM)이 새로운 한주를 준비하며 깊이 있는 지식과 정보를 찾는 분들을 위해 마련한 일요일 아침의 지식충전소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도 불릴 만큼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 인해 행정부의 힘이 세다.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국민들을 위해 '적극적인 행정'을 펴겠다고 하고, 국민 다수도 국가 행정에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적극적인 행정'은 역사가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한국정책학회장을 지낸 명승환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에 따르면 본격적인 행정학, 정부학은 1920~1930년대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때 탄생했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실업난과 빈곤 해소를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행정 체제가 만들어졌다. 대학교의 행정학과도 그때 처음 생겨났다.
명 교수는 머니투데이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행정을 통해 경제의 방향을 잡고 나서야 했던 대공황은 미국이 이전의 자유방임주의에서 현대적 자유민주주의로 변화하는 계기였다"며 "지금도 그렇듯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귀기울이고 가치와 질서의 방향을 잘 잡아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인 소유욕과 약육강식이 작용하는 시장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본모습"이라고 강조했다.
IT(정보기술)를 활용한 정부와 시장, 시민사회의 협력을 강조하는 e-거버넌스 연구의 권위자인 명 교수는 "정부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합리적인 목소리들을 열심히 들고, 국민의 뜻이 온전하게 국가 운영과 정책, 행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이 이 시대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일 것"이라고 말했다.
명 교수는 미국 시러큐스대학교에서 정책학(Social Science)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지역정보학회장, 전자정부연구회장, 한국정책분석평가학회장, 한국정책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스마트전자정부론', '행정학개론', '사이버 거버넌스', '정보사회와 현대조직' 등의 저서가 있다. 머니투데이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이 그를 만나 행정학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과 행정, 디지털 시대의 자유민주주의 거버넌스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교수님께선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먼저 잘 봐야 합니다.'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41년 연두교서에서 역설한 그것은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입니다.
린든 존슨 제36대 대통령이 1965년 의회 연설에서 제시한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 비전과 통치철학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회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누리느냐를 묻는다. 부의 축적뿐 아니라 어떻게 부를 쓸 것인지를,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를 먼저 묻는 사회다."
미국은 현대적 자유주의로 변화하는데 대공황이 계기가 됐습니다. 시장의 실패에 정부가 역할을 확대해 경제의 방향을 잡고 나섰는데 그 전의 오랜 자유방임주의에서 크게 바뀐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자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 가장 중요한 금리의 방향을 강력하게 콘트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처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귀기울이고 가치와 질서의 방향을 잘 잡아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미국의 시작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 자유주의의 근본이고, 이 근본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620년, 잉글랜드 출신 청교도 이민자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대륙, 신대륙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서 간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 그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이고 지금도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개인을 속박하고 굴레를 씌우는 것은 절대로 안되죠. 스스로 결국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노예해방까지 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국민들이 피흘려 자유를 쟁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불법에 매우 엄격하면서도, 낙태나 동성애를 자유의 속박으로 여겨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런 점들이 살아 있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변할 것은 변하면서도 더 많은 국민들이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말입니다.
저는 똑똑하고 정직한 엘리트뿐 아니라 약자·소수자들의 권익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현대적 의미의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인 소유욕과 약육강식이 작용하는 시장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본모습일 것입니다.
- 우리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려면 자유와 평등을 균형 있게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보수-진보로 진영이 나뉘어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논쟁 등으로 매번 충돌하며 갈등과 대립이 심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은 낡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념의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수와 진보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성장이 먼저다, 분배가 먼저다 하며 대립하는데 이 이분법도 낡은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성장과 분배 둘 다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정부가 둘 다 할 수 있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국민과 기업들로부터 강한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다 더 쉽고 빠르게 사업을 할 수 있고, 부를 키우고, 공정하게 부를 나눌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합니다.
- 정부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가요?
▶합리성과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합리모형은 인풋(input)-아웃풋(output)이 명확합니다. 정부는 합리적으로 정책의 목표와 수단 간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근거도 명확히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반복돼야 신뢰가 쌓입니다. 그렇게 명확하게 보여야만 국민과 기업이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명확하지 않아서 신뢰가 안됐습니다. 그 인기 많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순위 조작으로 신뢰를 잃었습니다. 음원 시장도 그랬다가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죠. 정부와 정책은 더 말할 게 없습니다. 투명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으로 밀실에서 정책을 만들고 추진해선 안됩니다. '보이는 손'(Visible Hand)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은 자동차 '블랙박스'와 '블록체인'과 같이 상호감시가 가능한 장치들이 너무나도 많은 디지털 대전환과 데이터 혁명의 시대입니다. 다 보이고, 다 알 수 있습니다. 정부도 발뺌만 하지 말고 변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사회는 예측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 정부, 의회, 언론, 국민, 기업 등이 공론장에서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나 혼자서만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민주주의를 하는 게 아닙니다. 공론장에서 항상 타협해야 합니다. 행정학의 거버넌스 연구에서도 세계적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한 공론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수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나치게 이념과 철학적 대립이 심했던 하버마스 시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실시간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할 수 있는 다양한 SNS 수단이 있습니다.
공론화 과정이 잘 이뤄지려면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합니다. 투명하게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는 거버넌스(governance)가 중요합니다. 거버넌스는 사실 우리말로 아직 마땅한 말이 없는 것 같은데 일본에선 '협치'(協治)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 정부와 공공 부문, 기업, 시민이 국정운영의 협력적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서로 잘 알아야 하고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잘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우리가 지금 '소통혁명'(communication revolution)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분석도 있는데요. 즉,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기술적 환경만큼은 매우 잘 갖춰져 있는 상황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디지털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공유가 쉽고 빠른 것입니다. 빌 게이츠가 '생각의 속도'에서 얘기했듯 생각이 바로바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행정에 접목한 것이 e거버넌스(Electronic Governance or e-governance), 전자정부(e-Government), 스마트정부(Smart Government) 입니다. 지금은 생각을 넘어서 '공감의 속도'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정책 결정자와 시민들 사이에 벽이 무너진 셈입니다. 시민들과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제되지 않고 국정운영과 정책에 넘쳐 흘러드는데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마치 지금의 가짜뉴스 같은 것들처럼 말이죠.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기술로 자정할 수 있습니다. SNS 상의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AI 시스템으로 잘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크로스 체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치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정책 결정자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국민의 뜻이 온전히 국가 운영과 정책, 행정에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일 것입니다.
- 끝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속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최근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연신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국, 러시아 등 독재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 진영의 연대를 강화하자고 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나 중국이 한동안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자국민을 극단적으로 속박한 것을 보면 자유주의에 대한 위협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경제 발전을 위해 질주하다 국민들의 자유민주주의적 요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자 엄청난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선 자유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우리', '집단'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기 어려운 구조죠. 그리고 글로벌 분업에서 중국에 제조를 맡겼던 미국이 다시 질서를 정리하고 패권을 휘두르자 중국이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은 아편전쟁 등 서구열강에 당했던 수난을 끝내고 모처럼 만에 잡은 위세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러시아도 그동안 수난의 역사였죠. 개혁·개방에 실패해 푸틴이 등장했고, 아시다시피 푸틴은 잘 나가던 시대의 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욕심 끝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미국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국에 단초를 준 셈이죠. 트럼프 이후로 미국이 이렇다 할 방향이 없었는데 다시 자유를 강조하며 진영 연대를 이끌면서 국제질서 리더십을 강화할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 우리 정부는 현재 한미동맹 강화 기조로, 국제사회 자유주의 진영 연대에 행보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중국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미중 패권경쟁에 계속 난처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와 미국 등이 중국발 코로나19 방역을 강화하자 중국 정부가 보복을 시사까지 했습니다.
▶우리 역사는 항상 중국 때문에 골치가 아팠죠. 너무 당했습니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입니다.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해서 외교 전략을 순진하게 가져가선 안됩니다. 중국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처럼 강력한 정보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이러스도 잘 만들고 백신도 잘 만듭니다. 창과 방패를 다 가지고 있는 셈이죠. 국가 전략 차원에서 그런 역량을 키웁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해관계국들이 치열한 사이버 첩보전을 벌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그 역량이 미흡합니다. 중국은 국가 지원 해커가 10만명이 넘습니다. 우리도 대비해야 하고, 전략과 시스템을 정비해야 합니다. 예비군 310만명이 형식적인 훈련만 할 게 아니라 정보전에 대비한 스마트 예비군이 돼야 합니다. 전 국민이 디지털에 능한 나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중국 지도부가 결단을 내려 독재주의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국가가 된다면 오히려 우리는 또다른 위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중국이 눈을 뜨는 순간, 중국이 기회의 땅이 되는 순간, 우리 인재들이 중국에 흡수될지 모릅니다. 남북이 갈려 있고, 그나마 수도권에서밖에 기회가 없는 우리로선 선택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도 무조건 믿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일본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도왔는데, 앞으로 우리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면, 일본과 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반미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상 보다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철희 기자 samsara@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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