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어느 날보다 달콤했던 사바아사나…번뇌여 안녕
한해 시작과 끝에 수련한
108번의 ‘태양 경배 자세’
고비 끝 찾아온 마음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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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요가 스튜디오가 한 해 마지막 날을 특별한 수련으로 마무리한다. 수리야 나마스카라 108배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바르게 선 자세(타다아사나)에서 시작해 팔을 하늘 위로 높이 뻗었다가 상체를 숙여 내려간 뒤, 플랭크, 업독, 다운독을 거쳐 다시 선 자세로 돌아오는 것이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를 108번 반복하는 수련은 불교 신도들이 108가지 번뇌를 떨쳐버리기 위해 행하는 ‘108배’를 변주한 것이다.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다가 108배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는데, 직접 해 볼 생각은 든 적이 없었다. 정말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될지 궁금한 마음 반, 한 해 마지막 날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대신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는 마음 반으로 지난해 12월31일 오후 서울의 한 요가 스튜디오에서 열린 수리야 나마스카라 108배 수련에 참여해 보기로 했다.
내가 이걸 왜 한다 했을까?
토요일 오후 12시,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닌데 지각하지 않고 매트 위에 오르는 것부터가 수련의 시작이었다. 전전날인 목요일은 회사 부서원들과, 전날인 금요일은 친구들과 송년회가 이른 저녁부터 잡혀 있었던 탓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의미를 담은 수련이라는데, 술을 진탕 먹고 숙취에 시달리다 빼 먹으면 새해를 찌뿌둥하게 시작하게 될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자제를 해 가며 술을 마시다가, 적당한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그런데도 이틀 모두 평소보다 한참 늦은 시간인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가까스로 도착한 스튜디오에는 평소보다 빽빽하게 매트가 깔려 있었다. 옆 사람 매트와 내 매트 사이 간격이 10㎝ 남짓했다. 선생님은 “108 세트 모두에서 정확한 자세를 고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각자의 몸 상태와 속도, 흐름에 맞게 수련하면 됩니다”라는 간단한 안내 이외엔 별다른 긴말 없이 바로 구령을 시작했다.
바르게 선 자세에서 시작해 마시는 숨에 두 팔을 하늘 위로 높이 뻗고, 내쉬는 숨에 허리를 숙여 양손을 발 옆쪽 바닥에 내려놓는다. 다시 마시는 숨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내쉬는 숨에 양발을 하나씩 뒤로 가져다 놓아 플랭크 자세를 취한다. 팔꿈치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몸을 바닥과 평행할 때까지 아래로 내렸다가, 발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벅지는 띄운 채 상체를 뒤로 젖혀 업독 자세를 취한다. 이어 양 발끝을 세우고 엉덩이를 하늘 쪽으로 높이 끌어당겨 다운독 자세를 만든 뒤, 양발을 다시 두 손 사이로 걸어 들어온 뒤 허리를 펴 두 팔을 하늘 높이 뻗고, 처음의 바르게 선 자세로 되돌아온다.
수리야 나마스카라는 ‘태양 경배 자세’라고도 불린다. 인도의 옛 요가 수련자들은 이를 매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수리야’는 해를, ‘나마스카라’는 안녕을 뜻한다. 실제로 서너 세트만 반복해 봐도 금세 체온이 오르며 온몸에 피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수련을 시작할 때 빠르게 몸을 풀기 위한 목적으로 많이 쓰인다. 길게 수련할 짬이 나지 않는 날에는 아침에 10∼15분이라도 내서 수리야 나마스카라를 10세트 정도 하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진 몸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들로 구성돼 있어 부담스럽지가 않다.
하지만 108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열 세트씩 세 번, 총 삼십 번 정도를 반복해 본 적은 있어도 108번은 그 힘듦의 정도가 가늠되지 않았다. 일단 선생님 구령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처음 삼십 세트까지는 ‘할 만한데?’ 싶었다. 하지만 경험해 본 적 없는 40, 50세트째로 넘어가자 잡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42.195㎞ 풀코스 마라톤으로 치면 아직 20㎞도 채 못 온 셈이었다.
“이제 절반 왔습니다.” 54세트째를 알리는 선생님 구령에 ‘꼭 이만큼을 더 해야 한다니,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후회가 들었다. 수련을 시작할 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던 옆 사람과의 간격 10㎝가 갑자기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졌다. 이때부터 다리 뒤와 겨드랑이 안쪽 통증이 전에 없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산에 갔다가 빠져버린 발톱도, 헝클어진 머리도 모두 크게 거슬렸다. 아무리 곁눈질을 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선생님 손 안 계수기만 자꾸 쳐다보게 됐다.
그렇게 70세트쯤 왔을까, ‘통증에 집중하다 보면 끝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흐름에 몸을 맡겼다. 80세트를 넘어 90세트쯤 오자 팔과 다리에 힘이 내 마음대로 안 들어갔다. 플랭크 자세에서 업독 자세로 전환하는 사이에 원래는 몸통을 곧게 유지한 채 팔꿈치만 뒤로 굽혀 내려가야 하는데, 팔다리에 힘이 빠지니 배와 매트가 자꾸만 ‘철퍼덕’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오른쪽 옆자리 수련자는 일찍이 무릎을 매트에 댄 채 몸을 내리는 동작을 하고 있었고, 시선이 닿지 않는 저 뒤편에서도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끙차’하는 기합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와 행복의 기운이 차올라
“이제 100세트, 여덟 번만 더 하면 됩니다.” 드디어 남은 횟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게 되자 수련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내 왼쪽에 있던 수련자는 갑자기 힘을 불끈 내더니 우타나아사나(허리를 굽혀 이마가 정강이에 닿도록 바짝 붙인 자세)에서 플랭크 자세로, 그리고 다운독 자세에서 다시 우타나아사나로 전환할 때 한 다리씩 뒤로 뻗거나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대신 양다리를 한 번에 ‘점프’하며 움직이는 고난도 동작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점프까진 못 해도 흐트러졌던 정렬을 바로잡아 처음 열 세트를 할 때처럼 최대한 정확한 동작으로 수련을 마무리하려 애썼다.
108번의 수리야나마스카라 끝엔 긴 사바아사나(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하는 송장 자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반에 걸쳐 가빠진 숨과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휴식 상태로 접어드는 데에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날의 사바아사나는 그 어느 날보다 깊고 달콤했다. 언젠가 요가 수업 중 들은 적 있는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세상 모두가 행복하고 자유롭길’(May all beings everywhere be happy and free)이란 뜻의 만트라(경구), ‘로카 사마스타 수키노 바반투’가 계속 입안을 맴돌았다.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한겨레신문 빅테크팀에서 국내외 정보기술(IT) 산업을 취재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엔 요가와 달리기, 등산, 사이클, 케틀벨 등 각종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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