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행복의 징조를 찾는 계절…“서로의 길상이 되어주길”
국립민속박물관 ‘그 겨울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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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吉祥)은 좋은 뜻을 담은 상징을 가까이 두고 기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특별전 ‘그 겨울의 행복’(3월2일까지)은 행복을 찾는 모든 행위가 길상과 통한다고 설명한다. 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많이 그려지는 십장생이나 호작도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에 비해 으뜸가는 벼슬을 얻으라는 뜻을 담은 게나 원숭이는 조금 난도가 높은 상징이다. 그럼 옛 그림에서 고슴도치나 고양이는 무슨 의미일까. ‘귀여움’ 외의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전시에 나온 그림 두 점을 눈여겨봄 직하다.
알록달록 다양한 소망들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의 작품 <자위부과도>는 오이를 등에 지고 달아나는 고슴도치를 그린 것이다. 몸에 난 가시를 마치 포크처럼 활용해 잘 익은 오이를 척 꽂아서 가져간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제 몸길이만 한 채소를 지고 가느라 오이는 거의 옆구리까지 내려와 떨어질락 말락 위태로운데, 고슴도치의 눈빛은 의기양양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고슴도치의 빼곡한 가시만큼, 다글다글한 오이씨만큼 자손이 번성하길 바라는 뜻을 품고 있다.
<유하묘도>(柳下猫圖)는 문화재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인기작이다. 봄날 버드나무 아래서 뛰어노는 고양이 가족을 그린 이 그림에는 부부 해로의 기원이 담겨 있다. 버드나무에 앉은 까치 두마리는 사이좋은 부부 한쌍, 고양이는 장수를 의미한다. 일흔살 노인을 가리키는 한자 모(耄)와 고양이 묘(猫)가 중국어에서 발음이 같은 데서 만들어진 상징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한자의 중국어 발음을 다 알았을 리는 없지만, 오늘날 전하는 수많은 길상무늬들이 얼마나 다양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청자, 백자 달항아리, 목가구 등 요즈음 사람들이 ‘옛날 물건’ 하면 떠올리는 것은 대개 채도가 낮은 담백한 색이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옛 문화재들 가운데는 원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색채를 가득 채운 것도 많다. 사람의 소망은 얼마나 다양한 빛깔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바람은 어떤 색을 입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물건들이다.
색색의 물건들로 가득한 전시실에서도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별전 열쇠패다. 열쇠패는 오늘날의 열쇠고리 같은 물건으로, 동전 모양 장식인 별전으로 꾸민 별전 열쇠패는 신혼부부의 안방을 장식하는 혼수품이었다. 살림이 늘어 자물쇠 채울 공간이 많아지길 바라는 기원을 담은 열쇠패에 비단 가닥으로 주렁주렁 매단 별전마다 길상무늬가 새겨져 있다. 먹으면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는 신선의 복숭아, 쌍둥이처럼 닮은 동자들, 십장생과 박쥐무늬 등이다.
그 그림 사이사이 알뜰하게 새겨 넣은 글자들에서도 행복의 기원이 되풀이된다. 오래 살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귀를 누리고, 건강하고 편안하며, 많은 자손을 얻길 바라는 것. 실을 감아두는 나무 실패에까지, 실처럼 긴 수명을 누리라고 수(壽)를 조각해놓은 것을 보면, 문득 옛사람들의 삶이 마치 모든 순간 행복을 비는 거대한 염주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시장 벽에는 15세기 사람인 서거정의 문집에 실린 이야기 한 대목이 소개되어 있다. 과거시험을 앞두고서 떨어질 락(落) 자가 들어가는 말은 뭐든 반대로 바꿔 말하던 서생 이야기이다. 대망의 시험 날, 그가 답안지를 땅에 떨어뜨리자 그걸 본 사람이 황급히 알려준다. 그런데 그의 평소 습관을 생각해 “당신 시험지가 섰소!” 하고 거꾸로 말하는 바람에, 서생이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답안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웃음 끝에 약간의 매콤함과 씁쓸함이 밀려오는 이 이야기 속에는 길한 것을 바라는 것도, 불길한 것을 꺼리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어리석음이 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평범한 삶의 온기
이렇게 옛사람들의 삶을 채웠던 오밀조밀한 염원을 보여주면서도, 이 전시는 살그머니 과거와 현재의 눈높이를 맞추어나간다. 관람객들은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고택 안을 구경하듯 전시 공간들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시대를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보고, 유물을 만들고 쓴 이들을 매일 일어나 밥을 먹고 저녁이 되면 잠드는 보통 사람들처럼 느끼게 된다. 곁들임 찬처럼 쉽고 짧은 전시품 설명도 편안한 분위기를 이끈다. 200여 점의 전시품을 ‘신기한 옛날 것’이 아닌 여느 평범한 삶의 증거들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각형 쇼케이스 안에 베개를 차곡차곡 쌓아둔 전시 후반부는 이런 손길이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지점이다. 나무틀에 헝겊을 댄 베개들은, 묵직한 솜이불이 쌓여 있는 할머니 집 장롱을 열어보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라는 원앙 무늬, 자식도 ‘연’달아 가지길 비는 연꽃과 연밥 무늬를 수놓은 손들의 주인은 아마 베개 주인이나 그와 가까운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기억은 진짜 내 기억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보고 들으며 만든 기억일 수도 있다. 나의 할아버지들은 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깡통에 든 사탕을 보면 손주에게 말없이 사탕 한 알을 권하는 과묵한 할아버지를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겨울의 행복’이라는 제목처럼, 이 전시는 어느 해의 어느 곳이 아닌 모두가 아는 계절 겨울의 심상(心象) 속으로 우리 마음을 이끈다.
몽타주를 그리는 탐정처럼 기물마다 빽빽하게 채워진 갈망을 들여다보다 전시장 가운데로 나오면 겨울 정원이 펼쳐진다. 그림책 넘기듯, 희끄무레하게 눈이 쌓여가는 산등성이와 철새들이 거니는 호숫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돌탑 쌓기, 새점 치고 부적 받기, 보름달에 소원 빌기 등 아기자기한 체험으로 마련해놓은 예스러운 기복(祈福)들이 다시 한번 새해가 왔음을 절감하게 한다.
그 겨울의 행복들을 돌아보고 나면, 이 겨울의 행복은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왜 새해는 모든 것이 메마르고 얼어붙는 매서운 계절에 오는 것일까. 추운 이 계절에야말로 따스한 봄을 가장 선명하게 그릴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과 달리, 행복은 내 맘에 꼭 드는 모습을 그려보면서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저마다 다른 것들을 행복이라고 느낀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우리는 선선히 행복한 새해 보내시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 너그러운 인사들 사이에서 우선 그려보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길상이 되어주길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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