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계급의 사다리, 사랑 통한 극복은 환상일까
네 청춘 사랑의 감정 가로막는
계급 격차로 인한 상처와 갈등
개인의 ‘선악’ 문제가 아니라
나 또한 기득권일 수 있음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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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사랑의 이해>냐, 남주랑 여주랑 맨날 서로 오해만 하는데 <사랑의 오해>지.”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시청하던 한 네티즌의 울분 섞인 댓글을 보며 난 폭소하고 말았다. 가상의 지점인 신협 영포점을 배경으로 한 사내 로맨스물인 줄 알고 작품을 보기 시작한 시청자들은, 메인 주인공인 상수(유연석)와 수영(문가영)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상황이 당혹스럽다. 1화에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달달한 분위기를 연출해 놓고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서로 멀어져서 주춤하는 과정이 반복되니 말이다. 급기야 5화에 이르면 수영은 상수가 아니라 서브남주 종현(정가람)과 이어지는데, 그조차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6화의 말미에 상수가 서브여주 미경(금새록)과 이어지며 ‘이렇게 네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건가?’ 싶을 무렵, 종현은 갑작스레 수영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혁진 작가의 동명 원작을 미리 접한 사람들이라면 놀랄 것도 없지만, 드라마로 <사랑의 이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다. 실제로 유튜브나 각종 커뮤니티에 <사랑의 이해> 클립이 올라오면 댓글 창은 이 고구마 전개가 괴롭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의 댓글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쩌나. 아무리 봐도 <사랑의 이해>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멜로 드라마가 아니다. 공식 누리집에서 대놓고 ‘연애 치정 누아르’라고 못 박아두고 시작한 <사랑의 이해>는, 사랑을 매개로 한국 사회의 첨예한 계급을 보여주는 작품에 가깝다. 네 남녀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지만, 그 감정을 가로막는 것은 계급이기 때문이다. 경제 사정, 학벌, 회사 내 직급과 직군 등으로 선명하게 나뉘는 계급 말이다.
감정을 가로막는 것은 계급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네명의 주인공이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장면을 보자. 네명 모두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점은 같지만, 같은 건 딱 거기까지다. 가장 가난한 청년인 은행 청경 종현은 믹스커피를 타서 마신다. 예금 창구에서 일하는 주임 수영은 손수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내려 마시고, 종합상담팀 계장인 상수는 캡슐커피 기계를 사용하며, 개인금융팀 브이아이피 고객 담당 대리인 미경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먹는다. 하루를 시작하는 의례에서부터 선명하게 갈리는 네 사람의 계급을 한 호흡으로 보여줌으로써 <사랑의 이해>는 이 작품이 한국 사회의 계급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과연 이렇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청춘들이,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랑의 이해>의 탁월함은 단순히 계급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계급을 이야기하는 그 섬세한 태도에 있다. <사랑의 이해>는 계급 구도를 간단하게 ‘나쁜 가진 자’와 ‘선한 못 가진 자’의 구도로 뭉개지 않는다. 계급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어떤 작품들은 ‘가진 자’를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더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나쁜 사람’으로 놓음으로써 계급 구도를 선악의 문제로 오도하곤 한다. 마치 ‘가진 자’가 조금만 더 선량하고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런 태도는 명확한 구조의 문제를 지워버린다.
<사랑의 이해>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벗어난다. 주인공 네 남녀 중 악의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계급의 사다리 최상층부에 있는 미경은 선의와 호감을 가지고 먼저 수영에게 다가가고, 배경이 아닌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상수 또한 모두가 무시하는 은행 청경인 종현을 언제나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는 매너를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선의와 호감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미경은 누구보다 더 살갑고 친근하게 수영에게 다가가지만, 명품백과 한정수량 목걸이를 덜컥 선물로 떠안기는 미경의 행동은 수영과 미경 사이의 계급 격차를 더 실감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악의가 있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는 세계가 달라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선의에서 비롯한 상처의 말
<사랑의 이해>는 계급 구도를 ‘1 대 99’의 싸움으로 간단하게 축약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윤리적 지위를 허락해주는 손 쉬운 선 긋기에서도 자유롭다. 상수는 홀어머니와 함께 반지하에서 자랐던 자신의 그늘을 생각하며 수영과 자신이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수영의 입장에선 그럴 리 없다. 당장 수영에게 일을 배웠음에도 상수가 수영보다 먼저 승진할 수 있었던 건, 수영은 파트타임 텔러 출신의 고졸자 창구직원이고 상수는 공채 출신의 대졸자 상담직원이기 때문 아닌가. 상수는 지점장의 부당 업무지시를 거절한 대가로 고충을 겪는 수영을 답답하게 여기며 그것을 ‘선택의 문제’라고 말할 만큼 수영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상수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비교했을 때에는 분명 결핍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수영의 처지까지 이해하지는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수영의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을 알지 못하는 상수의 말은 수영에게 상처를 남길 뿐이다. 세상에 1 대 99 같은 건 없고, 그 99 안에서 계급의 사다리는 촘촘하게 나뉜다.
이는 한층 더 진일보한 계급 서사다. <사랑의 이해>는 계급 격차에서 오는 갈등이 그저 개개인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며, 촘촘하게 그어진 선 위에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득권일 수 있음을 조용히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이해>는 멜로 드라마인 동시에 스릴러이기도 하다. 보는 이들에게 “나도 혹시 누군가한테 저런 말을/행동을 무신경하게 한 적은 없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구조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스릴러. 그래서 나는 네명의 청춘이 어떻게 이어지고 헤어질 것인가만큼이나, 이 작품을 만난 뒤의 시청자들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전에 없던 해상도로 계급 구조를 보여주는 <사랑의 이해> 이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변화할까?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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