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목소리 담고 착한건물주 운동 확산시킨 마을미디어의 가치

금준경 기자 2023. 1. 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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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일방 폐지한 마을미디어사업 11년의 의미
시도 구청도 못한 이주민 화합 기여, 다양성 구현과 지역 의제 발굴 역할
"마을미디어 매체 줄어들 것, 지역 네트워크까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

'날벼락' 같았다. 11년 된 서울마을미디어 지원사업이 한차례 협의도 없이 일방 폐지됐다. 한창 예산을 편성해야 할 시기인데, 시는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았고 담당자들은 답을 피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1월 서울시 행정사무감사가 열렸고, 서울마을미디어 관계자들은 노심초사하며 중계를 지켜봤다. 담당자인 최원석 서울시 홍보기획관은 “서울시가 충분한 마중물 역할을 했다”며 사업 폐지를 공식화했다. 이종배 서울시 국민의힘 의원은 “불순할 수가 있다”며 “지원금이나 세금 축내는 낭비되는 사업”이라고 비난했다. 서울마을미디어의 11년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서울시의 마을미디어 사업은 허브 역할을 맡는 민간기구인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가 위탁 받아 사업 전반을 운영하며 단체지원(공모) 사업을 통해 개별 마을미디어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서울마을미디어 사업은 2012년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뒤 2019년 조례를 제정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2020년부터는 민간 위탁 체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2023년 4월 위탁 기간 만료를 앞두고 서울시는 '연장'이 아닌 '폐지'를 결정한 것이다. 폐지 결정 이후,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서울마을미디어 매체들은 곳곳에서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2022년 12월22일 동작FM 라디오 부스에 초등학생들이 자리했다. 고릴라(박세현), 송아지(송시우), 오감자(오하람), 체리(이채린)라는 닉네임을 쓰는 영본초 4학년 학생들이다. 이들의 '부캐'는 '슬기로운 초딩생활 시즌2' 라디오 진행자다. 방송 시작 전만 해도 편하게 농담을 주고 받던 친구들이지만 '온에어'를 하자 전문 방송인 못지않게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계단에서 뛰지 않기' '방송 연습 때 진지하게 하기' '소리지르지 않기' 등 규칙을 정해 운영하고 있다.

▲ 동작FM '슬기로운 초딩생활' 제작 현장

'슬기로운 초딩생활'은 초등학생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를 담는다. 가족에 대한 얘기, 학업에 대한 고민, 나아가 기후위기와 학교 운영에 대한 생각도 털어놓는다. 이들은 가장 인상 깊었던 콘텐츠 가운데 하나로 '내가 교장 선생님이라면' 편을 꼽았다. 오하람 학생은 “4학년이 되니 체육이 화요일, 목요일 1시간씩으로 줄어서 아쉽다. 체육을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쉬는 시간을 20분으로 늘리고 수업 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이들의 콘텐츠는 친구들이 듣기도 한다. 송시우 학생은 “(시즌1) 선배들이 댓글을 달아주고 친구들이 잘 들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슬기로운 초딩생활'은 한 초등학생의 당돌한 제안으로 시작됐다. 2019년 보라매초 학생이던 이성민 학생은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고 자신도 라디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동작FM을 찾아가 먼저 제안했다. 시즌1을 맡은 이성민, 최준범,김채원 세 학생은 '우리들이 원하는 서울시장은?'을 주제로 토크를 나눴다. 서울시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각자 조사한 내용을 발표한 다음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시장이면 좋겠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않고 시민들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 “학교급식의 질을 높이고 더 맛있는 걸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쓰레기를 주우면 대가를 지불하면 좋겠다” 등의 의견을 냈다.

▲ '슬기로운 초딩생활 시즌1' 소개 그림일기 콘텐츠. 사진=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유튜브영상 갈무리

앞선 12월14일 저녁, 한신대 캠퍼스타운에서 와보숑TV의 성북마을뉴스 녹화가 진행됐다. 사무실 한 켠에 촬영장비가 설치됐다. 성북마을뉴스는 성북 지역의 알곡같은 정보만 골라 전달해주는 영상 뉴스로 3분 분량에 지역 소식을 압축해 전달한다. 10년차를 맞은 장수 프로그램이다. 촬영은 와보숑TV의 유일한 상근 직원인 이경숙 운영담당자가 맡았다.

진행은 하종민 성북마을뉴스 앵커의 몫이다. 연기자 출신의 경력단절여성이었던 그는 또박또박한 발음이 돋보였다. 호평 속에서 5년째 마이크를 잡고 있다. 이날은 노인일자리 참여 접수, 성북구 청년마음건강 바우처 모집 등 소식을 전했다. 장기간 진행된 프로그램이다보니 먼저 홍보를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 와보숑TV '성북마을뉴스' 제작 현장. 사진=금준경 기자

와보숑TV는 성북구 내의 소식 전달, 지역 생활예술인 소개, 지역 현안 조명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번은 치킨집에 갔는데 사장님이 '마을뉴스 진행하는 분 아니냐'고 하더라. 요즘 월세 내기 버거운데 우리동네에 착한 건물주가 나타났다며 이 소식을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상인회장을 취재했는데 이후엔 더 많은 건물주들이 임대료 인하에 동참해주거나 위로금을 전달해주셨다면서 고마워했다.” 하종민 앵커의 말이다.

이경숙 운영담당자는 2016년 동구학원 비리 공익제보 이후 보복성 징계를 당한 안종훈 동구마케팅고 교사의 '길 위 수업'을 영상으로 제작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스승의날을 맞아 성북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린 특별한 수업 현장을 담고 기록할 수 있어 의미가 컸다”고 했다.

그는 “동네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고 기록하는 일에서, 지역에서 소외되는 작은 것들을 찾아 기록하는 일에서, 혼자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주변에 알리는 일에서, 마을미디어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곳곳에서 마을미디어 활동가들이 서울을 누비며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서울에 언론이 많지만 대부분 '전국지'를 표방하고 있고 마을 단위 주목도는 높지 않기에 '사각지대'를 채우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성에 기여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서울 노량진 지역에 에티오피아 출신 이주민이 늘었는데, 동작FM에선 이들과 함께 콘텐츠를 제작한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인터뷰 콘텐츠를 제작하고, 이주민을 위한 한국어 온라인 교육영상도 유포했다. 콘텐츠 제작 외에도 이주민 교류 활동 등을 통해 이주민의 안착과 지역 커뮤니티 화합에 기여한다. 구청도 시도 하지 못한 역할을 마을미디어가 전담하고 있는 것이다.

영등포구에 위치한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는 8편의 이주민 인터뷰 영상을 제작하고 3편의 단편영화를 서울이주민예술제에서 상영했다. 노원FM은 '시각장애인 정보습득을 위한 노원구소식지 낭독 활동'을 통해 노원구청에서 발행하는 월간소식지를 낭독해 음성으로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이 제작한 동작FM 콘텐츠 갈무리
▲ 노원FM의 노원구 소식지 낭독 활동. 사진=서울시마을미디어지원센터 유튜브 영상 갈무리

마을미디어가 주목한 현안은 현실의 '참여'와 '변화'로 이어진다. 마포FM은 동네서점 폐업 사례에 주목해 지역 동네서점 30여 곳을 인터뷰했다. 이를 계기로 동네서점 간담회, 지역 서점 페스티벌, 토론회 등을 열게 됐다. 마포FM은 '알쓸마생' 콘텐츠를 통해 마포 소각장 문제를 조명했고, 구로FM은 구로지역 오류시장 개발사업 문제를 다뤘다.

성북구 마을미디어 잡지 성북동천은 성북구 '대표보행거리 사업' 추진 과정에서 보행권이 개선되는지를 조명했다. 이후 주민들이 '보행권을 고민하는 성북동 사람들의 독서모임'을 열고 워크숍 등을 진행했다. 봉제업 중심 지역인 서울 창신동의 창신동라디오는 봉제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봉제마을 살 길 찾기' 간담회를 열었다. 박원순 시장이 출연했을 때 봉제 사업자들을 위한 세무업무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마을미디어 지원사업의 위기가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니다. 2020년에만 해도 15억 원 규모이던 사업 규모가 2021년 10억 원으로 급감했고, 2022년에는 7억 원대 규모까지 줄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는 2022년에만 70여개 단체를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단체당 평균 지원금액은 360만 원에 그쳤다. 2021년 서울마을미디어는 3501건의 콘텐츠를 제작했고 지난해엔 3866건의 콘텐츠를 제작했다.

사업 예산이 사라지게 되면서 당장 제작에 어려움이 닥쳤다. 정은경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장은 “지원 받은 장비를 반납해야 돼 당장 콘텐츠 제작을 중단하게 된 곳들도 있다. 마을미디어 단체에 지원된 일자리 사업까지 없어져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곳들이 많다”고 했다. 양승렬 동작FM 방송국장은 “이주민과 기존 주민 사이의 교두보, 허브 역할을 위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서울시 지원이 있으면 탄력을 받아 더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현재는 자체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수익 사업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딜레마가 있다. 송덕호 마포FM 대표는 “서울시는 10년 동안 마중물이 되었으니 이제 자립할 때가 됐다고 하는데 자립이라는 말은 듣기 좋지만 쉽게 말하면 돈 벌라는 얘기”라며 “우리도 서울시 지원금이 많지 않기 때문에 활동 유지를 위해 수익을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러면 마을미디어 활동이 등한시되고 돈에 의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우려했다.

정은경 센터장은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동네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일 수 있게 해주고, 지역의 변화를 위해 공공적인 역할을 해오던 마을미디어가 하나둘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지난 10여년 동안 모아놓은 마을미디어 아카이브와 네트워크까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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