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3]전임 교황 베네딕토16세가 선종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가톨릭을 다시 일으켜 세운 원칙주의자라는 상찬과, 세상의 흐름에 뒤처진 꼴통이라는 힐난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가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몇몇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여성 서품 문제였습니다. 베네딕토16세가 추기경 시절 기독교 교리를 감독하는 신앙교리성을 이끌 당시, 여성도 마땅히 정식 신부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열망이 있었습니다. “신의 자식에 남녀가 따로 없다”는 논리에도 힘이 실렸지요. 2001년, 논란의 중심 속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성 사제서품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저는 말합니다. 열두 사도를 남자로 한 건 예수님이 만드신 틀입니다”. 사실상 거절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었습니다.
21년이 지나 보수의 대들보 베네딕토가 세상을 떠났고, 진보적 교황으로 이름난 프란치스코가 전 세계 가톨릭을 지도하는 지금, 여전히 중심은 금녀(禁女)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역사에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여성이 신부로 서품받고 주교 자리에 오른 것도 모자라 교황까지 올랐다는 믿지 못할 기록들입니다. 그것도 훨씬 더 보수적이었던 1200년 전에 말입니다. 여교황 ‘요안나’가 그 주인공입니다. 세 번째 사색, 가톨릭과 여성입니다.
교황 즉위에 고환 확인했다?… 교황 ‘요안나’ 진실게임
서기 857년. 교황 존이 베드로 성당에서 라테라노 궁으로 행차하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말 위에서 복통을 느낀 그가 소리를 지릅니다. 그가 말 아래로 떨어지고, 사타구니 사이로 피가 쏟아져피가 솟아 나옵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응애응애”.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교황이 사실은 여자였고, 그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황 존은 요안나라는 여성이었고,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은 그가 남성행세를 하여 가톨릭 최고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황청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힙니다. 그 이후부터 가톨릭에서는 교황 즉위에 사용할 의자 ‘세디아 스테코라리아’(sedia stercoraria)를 만듭니다. 마치 변기처럼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의자인데, 여기에서 교황의 ‘고환’을 확인했다는 것이지요. 하위 성직자가 교황 후보자의 고환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하베트 듀오스 테스티쿨로스 에트 베네 펜덴테스”. 우리말로 옮기면 “그분은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제대로 늘어져(?) 있노라”라는 뜻입니다.
가톨릭 비판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퍼진 가짜뉴스
앞서 말한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여교황 요안나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연대기에 나왔던 시기에는 엄연히 다른 남자 교황들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당대 수도사인 마르티니가 1265년 서술한 ‘교황과 황제 연대기’에는 여교황 요안나가 855년과 857년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레오 4세 와 베네딕토 3세가 버젓이 통치했음이 교황청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은 여교황 요안나의 진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관련 문헌도 여럿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마르티니의 연대기가 대표작입니다. 교황이 여자라는 파격적인 주제 때문이었는지 필사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이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여교황의 아들이 살아서 주교가 되었다거나 여교황 요안나가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쳐 한 수도원에서 살고 있다는 변형된 버전이 퍼졌다고도 합니다.
장 드 메일리(Jean de Mailly)라는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쓴 ‘보편적인 메츠 이야기’(Chronica Universalis Metensis)도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였죠. 교황이 즉위에 사용됐던 변기 모양 의자 ‘세디아 스테르코라리아’도 실존해 전해지는 탓에 이 전설에 더욱 힘이 실리는 모양새였습니다. (이 의자의 용도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 여교황 이야기를 무기삼아 가톨릭을 정면 비판하면서 공세를 강화했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현 체코지방인 보헤미안 출신 종교개혁가 얀 후스였습니다. 여교황 ‘가짜뉴스’가 진실로 굳어지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여교황 이야기 그 자체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지만, 전혀 뜬금없진 않습니다. 모티브가 된 사건은 있어서입니다. 교황청 수뇌부를 뒤흔든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904년 교황 세르지오 3세 시절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도덕적이어야 할 교황에겐 애인이 있었지요. 귀족 여성 마로치아였습니다. (당시 가톨릭 종교인들은 애인을 여럿 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로치아는 당시 로마 교황청 유력 인사 여럿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자신의 입김으로 여러 인물을 교황 자리에 올렸습니다. 단적인 예로 교황 레오 6세는 마로치아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교황에 올랐지만, 다른 이성과 또 다른 관계를 맺다가 마로치아에게 발각됐습니다. 마로치아는 레오 6세를 가둬 교살했다는 의혹을 받습니다. 전형적인 국정농단, 아니 교정농단이었죠. 마로치아가 지배하는 교황청의 상황을 빗대 창부정치(娼婦政治, pornocracy 포르노크라시)라고 불렀습니다. 성스러워야 할 교황청이 섹스와 살인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거죠.
당시 로마 사람들을 교황청에 ‘여교황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는데, 이 같은 정치 투쟁의 신화가 여교황 요안나 신화로 이어졌다는 설명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나옵니다.
여교황 이야기...현실 불가능한 전설에 불과할까
여교황 요안나의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성 신부의 가능성에 관해서입니다. 현대 여성들은 이 같은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결실을 본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 로물로 안토니오 브라스치 주교와 페르디난트 레겔스베르거 주교가 7명의 여성을 로마가톨릭 사제로 서품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헝가리 다뉴브에서 서품이 이뤄졌기에, 이들을 ‘다뉴브 세븐’이라 부릅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즉각 파문했습니다. 파문을 주도한 인물이 바티칸 신앙교리성을 이끌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후에 세계가 베네딕토16세라고 부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들은 전 세계 여성 사제 서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종교개혁인 셈입니다. 개신교의 하나인 대한성공회는 2001년 부산교구 민병옥 카타리나 사제 서품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24명의 여성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이 역시 1990년부터 이어진 투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여성 교황의 존재가 결코 전설로만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 너무 불순하고, 전위적인 생각일까요. 베네딕토16세가 지키고자 했던 원칙을 우리가 너무 쉽게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완고한 원칙주의로 신의 뜻을 헤아리려 했던 베네딕토 16세. 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참고자료>
ㅇ교황연대기(2014년),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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