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라면서 가장 비주체적… 중국 종속적인 북한의 역사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1회>
지난 70여 년 한반도를 배회한 좌익 전체주의의 유령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기초를 닦고, 스탈린이 기둥을 세우고, 마오쩌둥이 지붕을 얹고, 김일성이 서까래를 놓아 만든 죽음의 이념이었다. 이미 시대착오적 망념으로 판명되었음에도 그 낡은 이념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 선동, 권력 탈취, 사회 교란 및 국가 해체의 전술로서 가공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2023년 신년 벽두부터 그 문제를 “슬픈 중국”의 첫 화두로 잡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선동가들
2023년 1월 1일 새벽 2시 50분경 북한은 동해상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 또 한 발을 쏘았다. 2022년 한 해 동안 김정은은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 외치면서 39차례에 걸쳐 70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상 최대의 군사도발이었다. 올해도 북한의 군사도발이 그치지 않을 듯하다.
북한이 군사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남한 일각에선 어김없이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정치꾼들과 선동가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언론매체를 점령하게 된 이후로 국기(國基)를 허물고 헌정(憲政)을 파괴하는 거짓 선전과 허위 선동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 그들은 1987년 115명이 학살당한 대한항공 858 폭탄 테러를 대한민국 정부의 자작극으로 몰고 갔다. 재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임이 재확인됐음에도, 그들은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으며, 테러 주체인 북한에 대해선 한마디 비판도 없었다. 연쇄 살인의 누명을 쓴 엉뚱한 피고가 재판정에서 무죄를 입증했음에도, 패소한 원고는 정작 연쇄 살인의 진범에 대해선 원망도, 분노도 하지 않는 정신 분열적 아이러니다.
2010년 46명이 전사한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바로 그 세력이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로 좌초설, 미군 오폭설 등 숱한 음모설을 유포했다. 당시 전체 국민 30% 이상이 음모설에 휘둘려 북한을 감싸고 돌았다. 장장 5년이 지나서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북한 잠수정의 타격에 의한 폭침’임을 인정했지만, 테러를 저지른 북한에 대해선 비판도, 사과 요구도 없었다.
2010년 11월 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 나는 베이징의 한 학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 사석에서 만난 한국 학자들 몇 명은 북한의 군사도발이 이명박 정권 책임이라는 궤변을 펼쳐대고 있었다. 민간인을 살해하는 북한의 군사 테러를 감싸고 돌면서 한국 정부를 공격해대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주사파의 미망, 그들은 왜 김일성에게 사로잡혔나?
지난해 10월 한국 국회에서 이른바 “주사파” 논란이 일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장에서 그가 과거 SNS 글을 통해 자신들을 “말과 행동으로 수령님께 충성하는” 주사파로 모독했다며 격분했다. 그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운운하며 김문수 위원장을 거세게 몰아세웠다.
멀리서 그 뉴스를 보면서 1980년대 대학가를 장악했던 과거 그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 혹시 “과거 자신들의 행적이 수치스러워서 그 사실을 감추려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그러하다면 젊은 날의 미망(迷妄)과 치기(稚氣)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기 몫의 반성을 했어야 옳았다. 1980-9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의 운동권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NL파가 장악하고 북한과의 공조 속에서 “남조선 해방”을 위해 “반미 구국 투쟁”에 나섰음은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아는” 공공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구가 무너지고 구소련이 해체되기 직전, 대한민국의 지식계는 아편 흡입하듯 열광적으로 공산 전체주의 이념에 탐닉했다. 1987년 이후 이른바 “운동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 전역의 대학가 서점들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김일성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조악한 운동권 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난 신입생들은 소규모 독서회에 포섭되어 밤낮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들을 달달 외고 금단의 열매를 씹어 삼키듯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했다.
전대협 결성 이후 전국 대학의 학생회는 반일 종족주의와 반미의식으로 중무장한 주사파 세력이 장악했다. 그들은 밤마다 단파 라디오로 북한에서 송출하는 “구국의 소리”를 청취하고, 김일성을 반일 혁명의 초인적 수령으로 미화한 북한식 판타지 역사 소설 <<피바다>>, <<봄우뢰>> 등을 열독하고,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강독하며 김일성 수령유일주의를 내면화했다.
일례로 제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이 충북대를 방문했을 때 캠퍼스에 붙었던 대자보를 보면, “임종석 전대협 의장님 충북대에 오시다”라는 경어체가 눈길을 끈다. 당시 각 대학 주사파 운동권들은 김일성 수령론에 따라 학생의 수령 “학생회장”에 극존칭을 붙이는 몰상식을 연출했다. 북한식 문화를 흠모해서 널리 유포하려는 웃지 못할 반(反)문화적 망동이었다. 바로 그 주사파가 반성도, 자아비판도 없이 정계에 진출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지난 정권에서 대통령 최측근으로 맹활약했던 바로 그 인물들이다.
주체사상의 뿌리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김씨 왕조는 “주체”를 최고 이념으로 삼지만, 북한만큼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비자립적이고 의타적(依他的)인 사회도 없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어 있고, 이념적으로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에 의존하고 있다. 남한 주사파는 북한 정권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칭송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은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추종하고, 흉내 냈던 비주체적 모방자일 뿐이었다. 최소 다섯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개체의 자주성(自主性)을 부정하는 집체주의의 이데올로기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집체주의의 산물이다. 철학사에서 “주체”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 의지, 자율성, 독립성 및 자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김일성은 개인의 자주성을 송두리째 부정한 후, “민족”이란 집체의 집단주의적 주체성을 강조한다. 개체의 자주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독재정권이 외치는 민족의 주체성이란 고작 집권 세력 권력 유지의 술수일 뿐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말살하고 집단의 전체성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복사판이다.
둘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정치적 반대와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일당 독재의 이데올로기이다. 스탈린은 공산당 무오류성을 천명한 후, 전 인민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했다. 마오쩌둥 역시 공산당 영도력을 강조한 후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내세워 전 인민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김일성주의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전체주의적 일당 독재의 이념일 뿐이다.
셋째, 김일성 주체사상은 최고 영도자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는 일인 지배의 이데올로기이다. 스탈린에서 시작된 공산권의 인격 숭배는 문화혁명 시기 마오쩌둥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선례를 따라서 자신에 대한 인격 숭배를 강요했다.
넷째, 현실 정치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은 군사·외교적 반외세주의, 경제적 고립주의, 문화적 쇄국주의로 나타났는데, 이는 1950-60년대 마오쩌둥의 군사·외교 및 경제 노선과 대동소이하다.
다섯째, 마르크스는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선성을 강조지만,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물질적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의 ‘주관 능동성’을 강조한다. 인간이 주관적인 의지를 능동적으로 발휘하여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을 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정신주의적 발상이다. 실상은 전체 인민을 가혹한 집단 노역으로 내모는 총동원령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상, 이념, 사회 제도, 경제 정책, 통치 방식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일란성 쌍생아처럼 닮았다. 물론 1912년생 김일성이 19세 연상의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그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다 베껴 쓴 결과이지, 그 역이 아니다. 마오쩌둥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 대규모 “지원군”을 파견하여 만주로 패주한 김일성을 되살려준 생명의 은인이자 이념적 후견인이었다. 남한 주사파는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맞서 백두산 일대의 영토를 사수한 민족 자주의 영웅이라 미화하지만,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이념적 추종자이자 사상적 아류일 뿐이다.
물론 마오쩌둥 사상과 김일성주의 사이엔 눈에 띄는 차이점도 있다. 첫째, 마오쩌둥은 청(淸, 1644-1912) 제국이 넓힌 영토를 최대한 국토로 확보하기 위해 56개 민족을 통합하는 다민족 국가를 표방했지만, 김일성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민족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둘째, 김일성의 통치는 마오쩌둥의 통치보다도 더 억압적인 전체주의 신정이었다. 일례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모두 인민의 태양으로 숭배되었는데, 마오쩌둥은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지는 않았다. 반면 김일성의 생일은 태양절이라는 북한 최대의 국경일이다. 셋째, 김일성은 권력을 세습해서 3대까지 이어지는 전제 왕조를 만들었지만, 마오쩌둥은 당대 스스로 전제 권력을 누릴지언정 권좌를 핏줄에 물려주지는 않았다.
요컨대 김일성주의는 변종 스탈린주의며, 극단화된 마오쩌둥 사상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수입해서 더 극렬하고, 악랄하고, 극단적인 전체주의 이념으로 가공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비판하기 위해선 그 숙주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사상과 스탈린주의를 비판해야만 한다. 마오쩌둥 사상이 무너진 세상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은 그 존립의 근거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우상이 부서지는 그날, 북한에서 김일성의 우상 역시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중국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에 관심이 쏠린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중국의 지식인들
중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사상가 쉬요우위(徐友漁, 1947- )의 증언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개혁개방의 열기 속에서 대망의 1980년대가 열렸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은 본격적인 마오쩌둥 비판을 개시했다. 당시 사회과학원 연구생이었던 쉬요우위는 베이징 중공 중앙의 토론회에 참석했던 교수들에게서 마오쩌둥의 오류와 모순을 비판하는 격렬한 토론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당시 중국의 군부, 관계, 학계에는 마오쩌둥의 사상적·정책적 오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지적 흐름이 갈수록 크게 형성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10년의 대동란”을 직접 겪었던 홍위병 세대 중에도 마오쩌둥의 실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인물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 결과 1981년 6월 27일 중공 중앙은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후퇴였고, 엄중한 손실을 초래했으며, 그 최종 책임자는 마오쩌둥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은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덩샤오핑은 비판 세력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결국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살리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공 중앙에 과감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1978-79년의 민주장(民主牆) 운동이 일어나자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낀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30일 1) 사회주의 노선, 2) 인민민주독재, 3) 공산당 영도, 4) 마르크스-레닌 및 마오쩌둥 사상 등 4항을 굳게 견지한다는 이른바 “4항 기본 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10년 후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공 중앙은 탱크부대를 급파하여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톈안먼 광장의 시민과 학생을 무력으로 갈아엎고 강제로 해산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일인 지배로 나타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이 암암리에 마오쩌둥 사상의 복원을 추진하면서 오늘날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위상은 다시금 드높여지고 있다. 과연 오늘날 중국의 현명한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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