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의 시선] 한국 건강검진
[미디어오늘 이선영 MBC 아나운서]
건강검진은 연말이면 꼭 하는 숙제다. 직장인 건강검진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정해진 사업주와 근로자 모두의 의무라 사업장·직종에 따라 1년, 또는 2년마다 꼭 수검을 해야 하는데 MBC의 경우 모든 직원이 매년 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1년 내 언제든 하면 되는데, 꼭 미루고 미루다 연말에 “미수검시 과태료 부과” 같은 공지사항을 보고 나서야 부랴부랴 검사 예약을 하게 된다. 지난해에도 결국 마감을 열흘 앞두고 겨우 검진을 받았다.
아직 30대 중반인 나는 대부분의 지표가 양호하게 나왔는데, 한 가지 항목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그어져 왔다. 초음파로 들여다 본 일부 장기에 낭종이 여러 개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검진 결과를 우선 전화로 상담 받았는데, 이 낭종은 젊은 사람에게도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고 모양을 보아 우려스럽지는 않아 당장 큰 질환이 염려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원한다면 해당 과 전문의의 외래 진료를 예약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1년 만에 내 몸 속에 알 수 없는 종괴들이 갑자기 자라났다니. 덜컥 겁이 나 바로 진료를 예약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경우 발전할 수 있는 질병들을 모두 검색해 보았다. 상담사의 말처럼 걱정할 필요 없는 상태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암 같은 무서운 질병으로 진단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 몸 안의 미확인 종괴들의 존재가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에서 강제하지 않았다면, 내 몸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일 다음, 사랑 다음, 그렇게 아주 후 순위로 밀려 한동안 돌보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지난주 다섯 명의 소중한 생을 앗아간 과천 방음터널 화재 사건. 감식 결과를 뉴스로 전하며 내가 받은 건강검진표를 떠올렸다. '천장 패널:화재 위험(높음)', '환풍구:순환 기능 미흡(우려)'. 이 방음터널이 사람이었다면, 여러 항목에 형광펜 표시가 그어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화재가 난 과천 방음터널은 애초에 시설물 점검 대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아 안전진단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한 해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공사장에서, 빵 공장에서, 철로에서… 숱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여름에는 폭풍과 집중 호우로 몰아친 수마(水魔)가 숱한 사상자를 냈고, 10·29 참사로 온 국민이 비통함에 빠졌다. 다 다른 사고 같지만, 언제라도 탈이 날 문제를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아 일어났다는 공통점 속에 있다. 과천 방음터널, 10·29 참사처럼 애초에 살피지조차 않은 문제, 과거 여러 차례 위험 표시를 해왔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문제들. 더 먼 과거까지 짚어보면 나열할 수조차 없이 많다.
내 몸을 들여다보는 일도 누가 하라고 해야 겨우 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 면면을 다 챙겨 보는 일은 어떠랴. 자주 본다고 봤는데 어떤 질병은 너무 빨리 진행되고, 꼼꼼히 챙겨도 안 보였던 병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마주하는 병을 우리는 '사고'라고는 하지 않는다. 적어도 드러났던 환부는 다시 마주해서는 안 된다. 실은, 나아가 어떤 부분이 보이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하는데 아직 우리는 기본도 챙기지 못해 매번 비슷한 고통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올해도 전하기 힘든 어떤 비극이 큐시트를 차지할 것이다. 또다시 '예방', '사전 조치', '준비' 같은 것들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똑같은 뉴스를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온몸이 쓰리다. 지난해 우리는 너무 큰 고통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올해는 시작부터 검진을 단단히 하자. 건강검진처럼 꼭 해야 하는 숙제로 정해서 자주, 꼼꼼히 하자.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종양이 차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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