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 없는 할인 행사?…백화점이 말하지 않는 비밀 [언박싱]

2023. 1. 7. 0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세일 중인 백화점 모습. [연합]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시즌 오프(롯데백화점)’, ‘쓱페스타(신세계백화점)’, ‘신년 쇼핑 페스티벌(현대백화점)’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이 2일부터 보름간 진행하는 새해 첫 정기 세일 행사명입니다. 그런데 백화점들이 내건 이 같은 행사 이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매년 정기적으로 여는 할인 행사인데, 이번에는 ‘세일’이라는 단어가 쏙 빠졌다는 겁니다. 왜 할인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는 걸까요. 세일이라는 단어보다 시즌 오프, 페스타, 페스티벌과 같은 표현이 소비자들에게 세련된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 바꾼 걸까요.

아닙니다. 판촉 행사에 따른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위한 백화점들의 ‘꼼수’ 입니다. 처벌에 대한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죠. 세일이라는 단어와 시즌 오프, 페스타, 페스티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렇게도 큰 차이가 나는 겁니다.

“‘세일’ 아니고 ‘시즌 오프’ ‘페스타’ 입니다”
지난해 세일 중인 백화점 모습. [연합]

여러분들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쇼핑몰 등 대규모 유통 매장에서 할인 행사, 초특가 행사, 1+1 행사 등 다양한 형태의 가격할인 행사를 보셨을 겁니다. 이는 소비자에게 가격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상품 수요를 늘려 매출을 증가시키는 판매 전략입니다. 겉으로는 ‘할인 행사’ 성격을 띠고 있지만, 알고 보면 매출 증진을 위한 ‘판매 촉진 행사’이기도 한 것이죠.

그렇다면 판매 촉진 행사에 드는 비용은 누가 어떻게 낼까요. 원칙적으로는 백화점, 대형마트, 쇼핑몰 등 대규모 유통업자와 납품업자가 판매 촉진 행사를 실시하기 전, 서로 약정한 내용에 따라 부담합니다. 대규모 유통업자가 사전에 약정을 하지 않고 납품업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면, 그 즉시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이 됩니다.

비용 분담은 판매 촉진 행사로 얻을 예상이익의 비율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런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납품업자가 50% 이상 부담할 수 없습니다. 백화점, 대형마트 등 대규모 유통업자가 50% 이상의 비용을 반드시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공정위의 특약매입 거래에 관한 부당성 심사지침(특약매입지침)으로, 이를 위반하면 불공정행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문제는 붕 떠버린 특약매입지침 적용 기간에 있었습니다. 백화점들이 올해 첫 정기 세일 행사 이름에 ‘세일’ 단어를 뺐던 것은 특약매입지침이 지난해 31일로 만료됐기 때문입니다. 지침의 골자는 이미 아시다시피, 할인 행사를 할 때 대규모 유통업자가 50% 이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침이 만료된 올해부터는, 유통업자가 부담하는 판매 촉진 비용을 납품업자에게 50% 이상 부과해도 불공정행위가 더는 아닐 수 있다는 해석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 이유입니다.

이후 공정위가 해당 지침을 올해까지 연장할지 여부를 제때 확정 짓지 않으면서, 백화점들은 가격 할인이 아닌 재고 소진 성격이 강한 의미의 ‘시즌 오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대규모 쇼핑 축제를 떠올리게 하는 ‘페스타’, ‘페스티벌’ 단어를 활용했죠. 할인 행사로 인해 드는 비용을 납품업자에게 50% 이상 전가하더라도 뒤탈이 없게 미리 수를 쓴 겁니다.

불공정행위를 피해 갈 수 있는 한 가지 예외가 있긴 한데요. 납품업자가 자발적으로 요청해 진행하는 할인 행사라면, 사전에 약정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판매 촉진 행사 비용을 분담하는 비율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백화점이 주도해 세일 행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화점이 원해서가 아닌, 입점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요청해서 할인 행사가 기획된다.” 이쯤 되면 백화점업계가 왜 연초부터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물론 납품업자가 독자적이고 적극적으로 판촉 행사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것도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신년 판촉 행사는 더더욱, 사실상 갑의 위치에 있는 백화점이 기획을 진행한 뒤 납품업자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020년 5월 대법원도 이 같은 방식을 납품업자의 자발적 행위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판결을 보면 “대규모 유통업자의 기획 및 제안에 납품업자들이 동의한 것은 ‘자발적 요청’에 의한 판촉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내용이 서술돼 있습니다.

다행히 7일 공정위가 특약매입지침을 올해 1년 더 연장하기로 결정하면서, ‘세일’ 없는 세일 행사 헤프닝도 막을 내리는 모양새입니다. 공정위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 현상’에 따른 경제 위기로 판매 수수료 등 타격이 클 중소 납품업체를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정위가 특약매입지침 연장 여부를 적시에 공표하지 않아서 유통시장에 혼란을 끼친 점은 분명 잘못일 겁니다. 다만 백화점 3사가 이러한 불확실성을 노리고 해가 바뀌자마자 태도를 바꾼 데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빛났다”며 자평하는 그들의 말이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기를 파트너사와 함께 헤쳐간다는 ‘상생 경영’ 마인드부터 제대로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한편 국내 백화점 3사는 지난해 경기 침체와 소비 심리 위축에도 불구하고,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큰 폭으로 늘어나는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dsun@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