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가들' PD "최악의 미래를 그려보며 현재를 점검해보길"
XR·버추얼휴먼 등 활용해서 공상을 현실로 구현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초지능(인간의 지능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에 직접 개입해 행동까지 통제하는 가까운 미래. 덕분에 범죄율 0%라는 완벽하게 안전한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방화 살인 사건 신고가 들어온다. 어설픈 범행 흔적들로 인해 용의자를 바로 검거했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초지능은 도리어 수사 중단을 요청한다.
초지능이 지배하는 완벽한 유토피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EBS 시사교양프로그램 '공상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한 범죄분석관의 기억을 재현한다는 설정으로 미래의 과학기술과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들을 들여다본다.
장르를 따지자면 'SF 토크쇼'. 지난 4일 경기 고양시 EBS 본사에서 만난 '공상가들' 이미솔 PD는 "과학을 주제로 가볍게 수다 떠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 친구들과 함께 미래에 대해 공상해 보기를 바랐어요. 하늘에서 뭔가 떨어졌을 때 '혹시 이거 우주 쓰레기 아니야?' 하고 상상하게 될 만큼 과학이 일상으로 파고들게 하는 게 목표였죠. (웃음)"
'공상가들'은 메타버스, 우주개발, 인공 자궁, 사이보그 등 총 8건의 미래 범죄 사건을 다룬다.
이 PD는 "주제를 선정할 때 현실에서 개발되고 있으면서 20∼30년 안에 어느 정도 구현이 가능한 것들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공상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극도로 발전할 8가지 기술을 다룹니다. 그 기술들이 가져올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했죠.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데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볼 수 있길 바랐어요. 기술 자체는 죄가 없더라도 악용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니까요."
이 PD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시나리오는 '초지능 살인사건'이었다고 꼽았다.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 여성의 체내에 전파력과 치사율이 강한 바이러스가 생기는데,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한 초지능은 여성이 인류에게 더 큰 위협이 되기 전에 제거하기로 판단한다.
초지능은 여성에게 가장 빠르게 올 수 있는 사람을 임의로 지정하고, 바이러스를 제거할 방역 수단으로 그를 활용한다.
'공상가들'은 매회 두 개의 선택지 중 고르는 '밸런스 게임'을 통해 생각해볼 거리를 제시한다. '초지능 살인사건' 편은 '모든 결정을 초지능에 맡기는 나라 vs. 모든 결정을 국민투표로 하는 나라' 중에 선택해보라는 토론 주제를 던졌다.
이 PD는 "더 많은 사람이 '공상가들'을 보고 의견을 나눠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전편을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하고 있는데, '초지능 살인사건' 편에 유독 댓글이 많이 달렸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님과 함께 댓글을 일일이 세봤는데 이성적인 초지능에 맡기자는 의견과 불안전하더라도 국민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반반으로 나뉜다는 게 신기했다"고 전했다.
'공상가들'은 확장현실(XR), 증강현실(AR), 딥페이크 등 기존 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버추얼 휴먼(소프트웨어로 만든 가상의 인간)으로 범죄 사건을 재구성하고, 확장현실(XR) 기술로 공상 속 미래 세계로 들어간 듯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식이다.
이 PD는 연출적으로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XR 스테이지의 활용이라고 꼽았다.
이 PD는 "XR을 활용하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그 공간에 실제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며 "방송에서는 생소한 기술이다 보니 특히 촬영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운을 뗐다.
"XR 스테이지를 현실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조명과 카메라 무빙 등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정말 많아요. 보통 토크쇼가 리허설을 1~2일 정도 한다면, 저희는 촬영 전 8일 내내 리허설을 반복하며 본 촬영을 준비했어요. 덕분에 본 촬영에서는 마치 생방송처럼 한 편 촬영 시간을 약 3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죠."
신기술을 활용해 SF 토크쇼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는 사실 다큐멘터리에서 잔뼈 굵은 PD다. EBS 다큐프라임 '4차 인간'(2018)으로 휴스턴 국제 영화제 은상을, '뇌로 보는 인간'(2022)으로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이 PD는 "다큐멘터리만 10년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다른 버라이어티 쇼를 기획했다"며 "5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뇌로 보는 인간'을 2년 동안 공들여서 찍었는데 방송할 때쯤에는 '사람들이 과연 내 작품을 보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공상가들'은 제가 이제껏 만들어온 프로그램들과는 다른 포맷이지만 결국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잘 표현된 것 같아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다큐멘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탄생한 프로그램입니다."
co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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