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인사이트] 리용호의 숙청·김영철의 퇴진…'비핵화 협상' 지운 북한
대화 재개 여부 무관한 北의 '새 협상 전략'은 계속 수립 중
[편집자주] 2018년부터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북아시아 정세는 급변했다. '평양 인사이트(insight)'는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빠른 변화의 흐름을 진단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안한다.
(서울=뉴스1) 서재준 북한전문기자 = 북한의 비핵화 협상을 주도했던 고위 간부들이 모두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북한의 '2018년 버전' 비핵화 협상 전략의 완전한 폐기를 뜻한다.
리용호 전 외무상은 북핵 협상의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부터 본격 대미 협상에 관여한 그는 강석주-김계관이라는 북핵 외교 베테랑들의 자리를 이어받으며 '북핵 외교'의 거의 모든 순간에 주역으로 활동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북핵 협상 때 리용호의 역할이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유도 이러한 그의 이력 때문이다. 대미 협상의 실무 총책임자는 김영철이었지만, 북한의 핵심 협상 전략은 리용호-최선희(당시 외무성 부상)의 머릿속에서 나올 것으로 믿었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세간의 기대와 달리 협상을 결렬시키고 말았다. 리용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에 협상 재개의 시한으로 제시한 소위 '연말 시한'인 12월이 지나자 그의 시한도 끝나버렸다.
리용호는 2020년 1월 외무상에서 물러난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뒤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전직 미국 관리들의 증언과 자서전 등을 통해 하노이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적' 판단에 의해 틀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미 창구의 직접 소통을 맡았을 리용호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회담장에 들어설 때까지, 여느 정상회담이 그렇듯 어느 정도 결론이 정해져 있을(것이라 믿었을) 회담 전략을 상세히 보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담장 안에서 이것이 틀어졌으니 그는 본의 아니게 최고지도자의 체면에 먹칠을 한 셈이 됐다.
리용호는 '연말 시한'까지 어떻게든 협상을 재개시키려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고, 북한은 미국의 변화 없이는 핵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라가 됐다.
국가정보원이 '숙청'을 공식 확인한 리용호의 커리어는 그렇게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 김 총비서는 집권 중반부터는 간부들의 직책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잦은 인사를 단행했는데, 지난 2년간 유독 리용호는 한 번도 업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대미 협상 창구로 활동했으나 한 번도 징계를 받지 않고 외무상에 오른 최선희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리용호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최선희의 '건재'의 이유가, 실제 협상 과정에서 리용호와 의견이 다소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미국을 '믿고' 많은 것을 내주자는 리용호와, 미국을 깊이 믿으면 안 된다는 최선희의 노선이 달랐을 수도 있다는 취지에서다.
실제 리용호는 해외 경험이 풍부했고, 정말 '외교관'처럼 활동했다. 해외에서 북한이 참가하는 회담이 진행될 때 자주 기자들 앞에 서서 입장을 표명했고, '역대급'이라는 남한의 유행어를 망설임 없이 쓸 정도로 시류에 밝고 이를 자신의 업무에 적용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외교 방식을 구사하는지 잘 알았을 수밖에 없다. 비핵화 협상이 한창 진행될 때 미국에서 리용호를 대화 상대로 삼고 싶어 했다는 점을 봐도 그의 입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외교관인 탓에, 미국 외교의 '역대급 변수'였던 트럼프의 방식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최선희는 북한 내부에서 성장한 외교관이다. 미국을 연구하는 연구원에서 외무성의 미국국 주요 자리를 거친 그는 '북한의 관점에서' 분석된 미국의 이미지가 뼛속까지 각인돼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과정을 이끌어 간 것은 리용호였어도, 정답을 예견한 것은 최선희가 아니었을까.
비핵화 협상의 '총책'으로 김정은 총비서의 친필 서한을 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김영철은 지난해 12월에 열린 노동당의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확인됐다.
그의 퇴진은 지난해 6월 예고가 됐다. 그는 비핵화 협상의 결렬 후 원래의 자리라고 볼 수 있던 당 통일전선부장에 복귀해 꽤 자리를 지켰지만 작년 전원회의에서 통전부장직을 리선권(전 외무상)에게 내줬다.
이후에도 북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의 위원 자리는 지켰으나, 북한이 대외활동을 멈춘 만큼 그가 실질적으로 당의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하진 못하고 원로로서 자리를 지켰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관측이었다.
김영철은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천안함 폭침의 주역으로 지목받은 인사이기도 하다. 그가 비핵화 협상에 전면에 나서 남한을 방문할 때 국내에서 많은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
리용호의 '숙청'과 김영철의 퇴진은 북한의 대미, 북핵 협상 전략이 완전히 새롭게 개편될 것이라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지금 북한은 미국을 향해 '강 대 강, 정면승부'를, 우리를 향해서는 '대적 투쟁'을 외치면서 전례 없는 수준의 무력도발과 국방력 강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북한이 무슨 '협상 전략'을 세우겠느냐,라고 묻는다면 지금의 행보 그 자체가 전략 중 하나라고 답할 것이다. 또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전략도 수립되고 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지난 2018년에도 많은 준비를 거쳐 일순간에 정세를 뒤집었던 것은 북한이었다.
전략은 외무상인 최선희를 중심으로 꾸려지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전원회의 때 최선희가 리선권 통일전선부장, 김성남 당 국제부장을 양 옆에 두고 대외 사안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을 슬며시 공개했다.
점차 국정 운영의 경험이 쌓이고 있는 젊은 '대외 총괄' 김여정 당 부부장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자신들보다 '힘이 센' 나라를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경험이 담긴 북한의 새로운 협상 전략은, 언젠가 회담장에서 확인될 것이다.
seojiba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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