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vs 그들만의 사교클럽…'범피'를 보는 엇갈린 시각

김혜지 기자 2023. 1. 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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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 지원하는 민간조직…지난해 7월 이병관 이사장 취임
"범피 송년회와 같이 하지 그러냐" 전주지검장 말에 5개월 지나 이·취임식
전주지역범죄피해자지원센터(전주범피센터) 이사장 이·취임식 겸 송년회가 지난달 13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한 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문홍성 전주지검장을 비롯한 전주지검 주요 간부들과 김관영 전북도지사, 서거석 전북도교육감, 우범기 전주시장, 전주범피센터 신임 위원 12명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전주범피센터 제공)2023.1.7./뉴스1

(전주=뉴스1) 김혜지 기자 = 지난달 13일 오후 전북 전주시 효자동 한 호텔. (사)전주지역범죄피해자지원센터(전주범피) 이사장 이·취임식 겸 송년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문홍성 전주지검장과 황금천 차장검사를 비롯한 전주지검 주요 간부들과 김관영 전북도지사, 서거석 전북도교육감, 우범기 전주시장, 유희태 완주군수, 심민 임실군수, 김동수 군산상공회의소 회장, 김광호 전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홍요셉 전 전북지방변호사회 회장, 전주범피센터 신임 위원 12명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전주지검·전주범피 등에 따르면 도내 주요 자치단체장과 법조계 및 정재계 핵심 인사들까지 초대된 이날 이·취임식은 행사 열흘 전 갑자기 추진됐다.

이병관 신임 이사장(대자인병원장)은 이미 지난해 7월 취임했다. 하지만 이·취임식은 따로 열리지 않았다. 송현만 전임 이사장(전주호남주류상사 대표)이 이끈 이사회에서 코로나19 등을 이유로 이·취임식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이사장 이·취임식이 열린 배경에는 문 지검장의 한마디가 있었다고 한다.

7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문 지검장은 지난해 말 전주범피센터 임원진 일부와 가진 오찬에서 '왜 아직 (이사장 이·취임식을) 안 했느냐. 이왕 전주범피센터 송년회를 하는 김에 같이 하면 되지 않느냐'는 취지로 말했고, 이 발언을 전주범피센터 임원진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주범피센터는 매년 연말 송년회를 열 때 전주지검 주요 간부들을 초청해 왔다.

이에 전주범피센터 측은 이사장 취임 다섯 달 만에 이·취임식을 치렀다. 이날 1000만 원가량의 행사 비용은 이 신임 이사장이 사비로 전액 지불했다고 한다.

이는 범피센터(이하 범피)와 검찰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다.

범피는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의 심리 치료, 긴급 생계비, 돌봄 비용 등을 지원하는 민간 중심의 봉사 조직이다. 법무부 훈령에 따라 지난 2008년 출범, 현재 전국에 60개 범피센터가 있다.

주로 사업가나 기관장 등 지역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고, 재력을 갖춘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위원으로 활동한다. 전주범피에는 현재 90여 명의 위원이 있고, 인원 제한은 따로 없다.

위원들은 국비와 지자체 보조금, 기부금, 회비 등을 통해 범죄 피해자와 가족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범피를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집단으로 보고 있다.

반면 '부자들의 사교 클럽' 또는 '그들만의 리그'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범피 위원이 될 수 없고, 기존 위원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 등 까다로운 가입 절차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봉사 단체이지만, 실제로는 수사·기소권을 가진 권력 기관인 검찰 고위 간부들과 공식적으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통로라는 인식도 있다.

또 범피 위원 하나하나가 지역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어서 막강한 인맥을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이런 '후광 효과'를 노리고 범피 위원이 되려는 지역 유지도 많다고 한다.

범피 위원이 되는 과정도 쉽지 않다. 특히 검찰 입김이 세다는 게 중론이다. 법무부가 규정하는 정관 내 회원(위원) 자격 요건을 갖춰도 검찰에서 거부하면 사실상 범피 가입이 불가능해서다. "해당 범피와 관련된 지방검찰청 고위 간부가 누구냐에 따라 기준이 오락가락"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정관에는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된 후 3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 △금고 이상 형을 선고받고 집행 유예 기간이 끝난 날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 △법원 판결 또는 다른 법률에 따라 자격이 상실되거나 정지된 경우 등에 한해 회원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전주범피센터 한 위원은 "한 법조인이 범피 위원 가입을 희망했는데 정관상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검찰이 거부했다"며 "한 사업가는 형 집행이 끝났지만 기간이 얼마 안 지났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검찰에서 명확한 탈락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 추측만 할 뿐"이라며 "기존 위원들도 딱히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검찰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분위기"라고 했다. 범피 위원 가입 관련 법무부 규정에는 검찰 승인이 의무가 아닌데도 현실적으로는 검찰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경찰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사람의 범피 가입이 불발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수사권 조정 등으로 경찰과 대립해 온 검찰의 불편한 심기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억측도 나온다.

전주지검 측은 "위원 가입은 범피가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있고, 검찰은 범피 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해 관련 규정에 따라 범죄 이력 조회 등 최소한의 조언만 할 뿐"이라며 "범피가 의견을 내면 검찰은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이사장 이·취임식 관련 발언에 대해 문홍성 지검장은 "식사 자리에서 범피센터 측에서 먼저 '아직 취임식을 못 했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관계상 지나가는 말로 '만찬 때 하시면 되겠네요'라고 얘기했을 뿐 행사에 일절 관여한 바 없다"며 "(해당 행사에는) 범피 초청을 받아서 갔고, 그 자리에 누가 초대됐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소에도 오해를 살까 봐 자치단체장들과는 공식적인 모임 아니면 사석에서 거의 만난 적 없다"고 했다.

전주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위원들.(전주범피센터 제공)2023.1.7./뉴스1

전주범피센터는 매년 위원 수가 늘고 있고, 예산도 5억8000만 원에 달한다. 하지만 정작 범죄 피해자 지원 업무와 예산 집행·정산 등은 내부 직원 2명이 전담하고 있다. 이마저도 최근 1명이 그만뒀다.

범피 위원들은 규정상 1인당 연간 150만 원의 기부금을 내야 한다. 전주범피센터는 2021년보다 위원 수가 20명가량 늘었다. 그러나 지자체 보조금이 줄면서 전체 예산 규모는 줄어든 상태다.

범피 위원 일부는 자체 간담회나 정기 회의엔 잘 참석하지 않으면서 검찰 간부들이 나오는 자리엔 참석률이 높다는 게 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에 법조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범피 위원들이 본인 영향력 키우기나 낯내기에 치중하다 보니 범죄 피해자와 가족의 일상 회복을 돕는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범피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인적 구성과 제도를 다시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김영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지방자치연구소장은 "일반 시민은 범피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른다"며 "봉사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사회 고위층만의 조직처럼 베일에 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범피 위원을 구성할 때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고, 기득권을 갖지 못하도록 임기를 제한해야 한다"며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죄 피해자 지원 관련 한 전문가는 "전국적으로 범피 위원들은 범죄 피해자 등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 역할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본다"며 "다만 국비와 지자체 보조금 등이 투입되는 만큼, 기관 운영의 효율성과 적정성에 대한 관리·감독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범피 위원 수가 많은 것보다 기부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위원들도 범피에 들어갔다는 데 만족할 게 아니라 해바라기센터 등 다른 유관 기관들이 할 수 없는 일이 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iamg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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