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추락’의 시대···매체별 ‘읽기 전략’을 짜라[책과 삶]
나오미 배런 지음·전병근 옮김|어크로스|488쪽|1만9800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가면 책의 신전과 같은 황홀한 도서관을 마주할 수 있다. 롱룸 도서관의 높은 천장, 오크 나무로 된 아치형 대들보 아래엔 수많은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안으로 가면 9세기쯤 만들어진 복음서 ‘켈스의 서’가 전시돼 있다. 양피지에 화려한 아이콘(도상)과 그림, 라틴어로 새겨진 복음서는 책이기 전에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다. 아일랜드의 국보이며 서양 캘리그래피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고서가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힌 채 밖으로 나오면 트리니티 대학의 학생들이 캠퍼스를 오간다.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킨 채 엄지 손가락을 위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책의 역사는 양피지에서 종이책으로, 디지털 기기로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주도권을 디지털에 넘겨주고,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책의 신전’이 될 것인가.
종이책 대 전자책…무엇으로 읽을까
종이책 효율적이지만, 현실은 디지털에 기울어진 운동장
이분법을 넘어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디지털과 모바일 기기의 급속한 발달과 대중화로 종이책을 읽는 젊은 세대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읽기의 쇠퇴’를 우려하고 있다. 언어학자 나오미 배런은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는 논의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답은 ‘둘 다’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읽을 것인지에 따라 ‘읽기’에 적합한 매체를 효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매체, 다양한 플랫폼 시대에 목적과 필요에 맞는 ‘읽기 전략’을 짜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문해력’이다.
인지신경학자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에서 종이책 독서가 가진 ‘깊이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양손잡이 뇌’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깊이 읽기’ 과정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뇌가 바로 ‘양손잡이 뇌’다. 울프는 디지털 매체로 읽는 행위는 ‘얕은 읽기’에 그친다며 종이책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배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미 교육현장과 일상생활에서 컴퓨터, 태블릿 PC, 스마트폰 등이 대중화된 가운데 종이책에 일방적 지지를 보내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디지털은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운동장은 디지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종이와 디지털 사이의 운동장을 최대한 평평하게 만드느냐”가 진짜 중요한 일이다. 배런은 20년간 미국,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를 통해 읽기와 문해력에 관한 다양한 최신 연구 결과와 연령과 목적에 따른 매체 활용법을 상세히 제시한다. 종이책에 대한 신화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디지털·오디오북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음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일단 종이책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종이는 친숙하고 물성이 있으며 밑줄 긋기나 여백에 메모를 하는 ‘주석 달기’를 통해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쉽다. 주석 달기(여백에 써넣기)는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특히 효과가 높다.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긴 텍스트를 읽을 때도 단연 종이책이 우월하다.
“소설책 읽기는 높은 수준의 이해 기술에 도움”
핸드폰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지력 저하
교육현장 점령한 디지털···교육 효과에 대한 신중한 검토 필요
여가 시간에 읽는 긴 소설책이 좋다. 7~16세의 어린이가 여가를 이용한 읽기로 책 한 권 분량을 읽는 빈도가 높을수록 독해력이 높았다. 이를 ‘소설 효과’라고 한다. “소설책 읽기는 추론하기라는 더욱 높은 수준의 이해 기술에 독보적이면서도 확실한 도움을 주는 유일한 읽기 습관이었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데도 종이책이 앞섰다. 장소와 시간에 관한 질문의 경우,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눈으로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이 가능한 종이책의 물성이 독자가 이야기 속에서 시공간적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결론은 종이책의 압승일까? 안타깝게도 교육 현장에선 아니다. 교육 효과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디지털은 교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미국에서 교과서가 빠르게 전자책으로 대체된 진짜 이유는 비용이었다.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의 벼랑 끝으로 몰린 캘리포니아주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고등학교에서부터 학생들에게 무료 디지털 교과서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주 예산도 적자여서 교실에서도 비용을 더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에 교과서 출판사들의 수익 확대 전략도 한 몫 했다. 한국의 교육 현장도 빠르게 디지털화하고 있다. 서울시는 2022년 중학교 신입생 전원에게 태블릿을 무상지급했으며, 2023년부터 고등학생, 2024년부터 초등학생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코로나19 팬데믹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질병의 위협이 완전한 한 권의 종이책으로부터 분절된 디지털 텍스트로 옮겨가는 데 일조”했다. 원격수업이 이뤄지면서 교재는 온라인에서도 내려받을 수 있는 형태의 파일로 올려지거나, 전자책으로 대체됐다.
지금이라도 디지털 읽기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해야한다. 울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디지털 기기를 통한 읽기는 빨리 읽기, 훑어읽기, 건너뛰기 등 ‘얕은 읽기’를 사용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멀티태스킹과 하이퍼링크는 주의를 분산한다. 배런은 매체의 물리적 속성 못지않게 ‘마음가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디지털로 읽을 때 종이책을 대할 때보다 더 가볍고 얕은 읽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한 연구결과 휴대전화가 눈 앞에 있기만 해도 사용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왔다. 무음 모드일 때도 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전자책 쥐여줘도 될까
부모와 상호작용은 종이책이 효과적···책에 대한 흥미 유발에 전자책 도움
디지털에서 ‘얕게 읽기’ 종이책까지 영향 미칠 우려
교육을 통한 ‘읽기 습관’ 만들어야
어린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질문에 대한 답도 있다. 아이들에게 디지털 책을 쥐여줘도 될까? 책을 읽어주는 목적이 부모와의 대화와 상호작용에 있다면 종이책이 유용하다. 대화식 읽기가 디지털 책일 땐 줄어들었다. 음향, 애니메이션 등의 기능을 가진 증강형 디지털 책의 경우 증강 기능이 이야기의 줄거리와 직접 관련이 있다면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게임처럼 아이의 관심을 이야기 내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우는 독서를 방해했다. 어른이 없는 경우에 한해 애니메이션이나 음향효과로 증강된 전자책을 사용했을 때 아이들의 어휘와 이해가 더 나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디지털 책을 제일 먼저 쥐어주는 것은 곤란하다. 먼저 전자책을 읽은 아이는 그 후로는 종이책을 읽지 않으려 했다.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디지털이 권장하는 ‘얕게 읽기’가 종이책을 읽을 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다. 디지털 기기가 교육 현장에서 권장되면서 학생들은 디지털이 종이책보다 더 낫다고 인식하게 된다. 학생들에게 디지털과 종이 텍스트로 읽게 했을 때, 디지털로 읽은 학생들은 더 삐르게 읽고, 독해 시험 성적은 더 낮았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오래된 명제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디지털 스크린은 본성상 짧은 글을 선호한다. 교육 현장에서 텍스트가 문학적인 것에서 정보 위주로 옮겨가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정보 추구와 문제 풀이에 치중한 교육이 이뤄지면서 문학 작품 읽기가 뒷전이 될 때 학생들의 사고의 깊이에 의도치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소설책 읽기는 추론과 독해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상기해보자.
전자책, 오디오북 등이 항상 종이책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목적과 대상에 따라 적절히 이용한다면, 기존 종이책의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디오북을 이용하거나 디지털 기기를 통해 글자 크기를 확대하고 자간과 행간을 넓게 설정한 것이 독서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독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전자책은 종이책 읽기를 위한 발판 역할을 했다.
‘얕게 읽기’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이 함께 이뤄진다면 디지털 읽기에서도 종이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디지털이 이미 읽기를 지배한다면 교육을 통해 올바른 읽기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한 ‘꿀팁’도 책엔 가득하다.
스벤 버커츠는 ‘깊이 읽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천천히 생각에 잠기며 한 권의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저 단어를 읽는 게 아니다. 그 주변에서 우리의 삶을 꿈꾸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 문제만이 아니다. “민주 국가 시민으로서의 성공까지 달려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족집게식 정답은 없다. 변화는 진행 중이며, 그에 대응하기 위해 실증적 연구에 따른 읽기 전략을 만들어가야 한다. 교육 당국, 교사, 학부모, 책을 읽는 누구든 마찬가지다. 배런이 건네는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더 많이 읽어라. 읽을 때는 집중해서. 무엇으로 읽을지도 중요하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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