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사본으로 '탈탈'…편리한 비대면 금융 플랫폼의 그늘
(서울=뉴스1) 남해인 기자 = #박모씨는 2년 전 해킹을 당하면서 신분증 촬영본이 유출됐다. 피해 사실을 확인한 건 평소 이용하던 증권에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다 팔린 걸 알고 나서였다. 주식 담보 대출도 박씨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졌다. 박씨는 "증권사에서 이상 거래를 탐지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고모씨는 "쓰고 있던 휴대폰이 고장났다"며 자녀를 사칭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 내용을 따라 휴대폰에 앱을 설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앱을 통해 유출된 신분증 촬영본을 이용해 범인은 한 은행에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금융 플랫폼의 허술한 비대면 신분증 인증 시스템 문제가 커지고 있다. 신분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지 못했다. 금융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은 금융회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비대면의 허점을 이용한 금융사고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금융 플랫폼 신분증 진위 확인 시스템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을 강화하고 금융사에게 배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신분증 사본 인증 피해자 모임'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자금융실명거래 확인 오류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를 위해 집단 법적대응에 나설 예정이라고 3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오는 31일까지 금융사고 권리구제를 위한 청구·신청인단을 모집한다.
금융 플랫폼 비대면 신분증 인증 시스템과 연관된 이 사고는 스미싱·보이스피싱과 해킹 등에서 시작됐다. 전화 통화로 현금을 요구하던 기존 보이스피싱 수법과 달리,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거나 해킹을 통해 신분증 촬영본을 몰래 빼내는 수법이 많아졌다.
범인들은 피해자들의 신분증 사본을 확보한 뒤, 사본과 원본을 구별하지 못하는 비대면 신분증 인증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했다. 이들은 신분증 사본을 이용해 금융 플랫폼에서 피해자 명의로 로그인을 하거나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거액을 이체하거나 대출을 받아 현금을 빼앗았다.
당시 금융사의 인증 절차는 신분증 원본이 아니라 이를 촬영한 사본만 있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유출된 신분증 사본이 금융 범죄에 이용된 것이다.
경실련은 지난해 1월부터 1년간 진행한 상담을 통해 확인한 비대면 신분증 확인 금융사고 피해자만 570여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경실련은 금융 플랫폼의 '신분증 진위 확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했다.
정호철 경실련 금융개혁위원회 간사는 "현재 신분증 진위 확인 관련 인증 기술이 있지만, 시중은행 등 금융사들은 신분증 진위 확인 시스템 도입과 관련된 정보통신 투자 비용이 아까워서 고의로 도입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신분증 진위 확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사본과 원본이 구별될 만큼 높은 해상도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경실련에 따르면 해상도가 높을수록 데이터 용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금융사들은 정보처리 비용 부담이 폭증한다는 이유로 인증 절차를 부실하게 운영했다.
지난해 7월 경실련이 신분증 사본을 통한 비대면 본인인증 절차가 허술하다고 지적하자 금융위원회는 신분 확인 절차를 강화하는 등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피해자들은 이를 근거로 '금융사의 피해 방지 책임'을 위반했다며 금융사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금융기관 상당수는 사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경실련은 주장했다. 대다수 금융사들이 피해금 환급이나 채권소멸을 거부하고 채무 상환을 독촉했다는 것이다.
경실련은 "(금융사들이) 피해구제나 지급정지 등을 조건으로 한 '도의관념에 부적합한 비채변제'만을 일삼으며 부당이득만 편취하고 있다"고 전했다. 비채변제는 원칙적으로 채무가 없지만 변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우 변제한 금액에 대한 반환 청구가 어렵다.
법조계는 금융 플랫폼의 비대면 신분 확인 절차의 허점에 위법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3일 기자회견에서 김보라미 변호사는 "다운받은 사진으로 신분증을 위조해 대출을 받은 경우엔 대출계약의 효력을 부인한 판례가 존재한다"며 "누구나 유출된 개인정보로 금융사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만큼 금융당국이 경각심을 가지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hi_na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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