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당나라, 문학과 와인과 풍류가 넘치다

박현주 미술전문 2023. 1.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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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신화/뉴시스] 중국 티베트자치구 창두시 망캄현 나시읍의 한 주민이 집에서 와인을 만들고 있다.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당나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위치한 타림분지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서역을 다시 차지한다. 790년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에 빼앗길 때까지 150년간 지배했다.

당시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이슬람 제국과의 무역이 번창했다. 와인도 자유롭게 조달할 수 있었다. 중국 본토에서 와인 생산도 급속히 늘어났다. 와인의 중흥기였다.

중국 내 와인 생산지역은 양주(凉州)와 장안(長安)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됐다. 그중 산시(山西)성 태원(太原)은 대표적인 와인 산지였다. 나중에는 산둥반도 등 황하 동쪽을 일컫는 하동(河東) 지역까지 퍼진다.

당시 ‘葡萄酒’(포도주)라 불리는 술은 세 가지 방법으로 만들었다. 포도만 발효시키는 서역 방식의 정통 양조법, 곡물에 누룩과 포도를 함께 넣고 발효시키는 방법, 또 이에 열을 가해 끓인 후 숙성을 촉진하고 불순물을 여과하는 중국식 양조법이다.

서역에서 들여온 비니페라종 포도는 여전히 귀한데다, 제대로 된 양조법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중국 고유종 포도는 자연적인 효모만으로 와인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당도가 높지 않고 껍질이 두꺼웠다.

끓인 와인을 ‘소주’(燒酒)라 부르기도 했다. 일부 중국 학자는 이를 오늘날의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라고 주장하나, 후에 ‘바이주’(白酒)로 발전한 증류주는 원나라 시절 몽고군이 처음 중국에 들여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고로 요즘 우리나라의 희석식 소주는 물론 증류식 소주도 ‘세번 빚을 주(酎)’자를 써 ‘燒酎’로 표기하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이전의 우리나라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표기이다. 우리나라의 증류식 소주도 원나라 시절 들어왔다. ‘燒酒’가 맞는 표현으로 보인다. 일본 소주(니혼 소츄)는 ‘燒酎’라고 쓴다.

고대 중국에서는 발효시킨 후 거르지 않은 술은 ‘배’(醅), 두 번 거른 술은 ‘발’(醱), 세 번 거른 술은 ‘주’(酎), 한 번 빚은 술을 다시 사용해 빚은 술은 ‘두’(酘), 술을 담그는 것은 ‘양’(釀)이라 썼다. 유신(庾信)의 춘부(春賦)와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서는 ‘발배(醱醅)’라는 글자가 발효의 뜻으로 쓰였다.

“백년이면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은 마셔야 하네. 멀리 강물을 바라보니 오리 무리처럼 푸르러, 흡사 포도주가 발효하는 것 같구나. 이 강물 만약 변하여 모두 봄 술 된다면. (百年三萬六千日, 一日須傾三百杯(백년삼만육천일, 일일수경삼백배). 遙看漢水鴨頭綠, 恰似葡萄初醱醅(요간한수압두록, 흡사포도초발배).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양양가’)

수요가 급증한 반면 공급은 부족하자, 술에 물을 섞기도 했다. 1000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진흙이나 석회를 넣기도 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처럼 술이 쉰 것을 희석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양을 늘리기 위한 목적도 컸다. 시인이자 애주가였던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원진(元稹, 779~831)이 이를 비판한 기록이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백거이는 양조 전문가이기도 했다.

양조과정에서 곰팡이로 인해 술의 색깔이 녹색으로 변하기도 했는데, 이를 ‘녹주’(綠酒)라 불렀다. 서역에서 들여온, 세 종류의 과일 즙으로 양조한 ‘삼륵장주’(三勒漿酒)도 술 색깔이 녹색이라 ‘녹주’로 불렀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술이다.

당나라 시대에는 와인뿐만 아니라 술의 재료나 지역에 따라 온갖 종류의 술이 넘쳤고, 문학 또한 번성했다.

시인들은 술을 마시면서 글을 썼고, 술이 글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당시’(全唐詩)는 당시(唐詩, 당나라 시)를 모아 엮은 한시집으로, 900권이나 된다. 수록된 작자는 2900명, 작품 수는 4만8900수에 이른다. 이 중 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작품이 22%다. 오히려 이백과 두보(杜甫, 712~770)는 약과인 셈이다. 이백은 1500수의 시문 중 16%에서 술을 언급했고, 두보가 남긴 1400편에는 술 ‘주(酒)’자가 들어가는 것이 20%이다.

이 분야는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이자 취음선생(醉吟先生)으로 불린 백거이가 한 수 위다. 그의 시 2800여편 중에서 술과 관련된 시가 900여편으로, 30%나 된다. 술 주(酒), 취할 취(醉), 잔 배(杯), 마실 음(飮) 등 술 관련 표현은 무려 1867곳에서 등장한다.

백거이도 와인을 좋아했다. ‘화몽유춘시일백운’(和夢游春詩一百韵) 등에서 와인을 언급했다. 두보도 술을 좋아했지만, 상대적으로 와인과 관련된 일화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생 가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11살 연상인 이백과는 ‘절친’으로 1년 반 동안 하남지방을 함께 여행한 적도 있어 와인을 마실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이백·두보는 각각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으로, 백거이는 ‘시의 마왕’(詩魔)으로 불렸다.

이들 세 사람과 함께 ‘이두백한’(李杜白韓)으로 불렸던 한유(韓愈, 768~824), 유우석(劉禹錫, 772~842)과 왕한(王翰, 687~726)도 중국 와인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글을 남겼다. 특히 유우석은 ‘포도가’(葡萄歌)에서 포도나무 심기, 가지치기, 관개, 포도의 수확 등 포도의 재배과정을 5언 절구로 표현했다. 와인 산지인 양주와 인접한 병주(幷州) 출신의 왕한은 ‘양주사’(凉州詞)를 지었다.

“좋은 포도주를 야광잔에 가득 따라 놓으니 마시려는 순간 비파가 재촉하는구나. 술에 취해 모래 위에 굴러도 그대 비웃지 말게. 예로부터 전쟁 나가 몇이나 살아왔던가. (葡萄美酒夜光杯 欲飮琵琶馬上催(포도미주야광배 욕음비파마상최). 醉臥沙場君莫笑 古來征戰幾人(취와사장군막소 고래정전기인회)).”

와인과 함께 문학과 음악과 풍류가 넘치는 시대였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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