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먹을 게 없는데 자식만 자꾸 낳으면...” 조선을 달군 ‘산아제한’논쟁
‘산아제한이 가(可)하다 부(否)하다 함은 전 세계의 문제가 학자간에 여러가지 토론이 되는 중대문제인 바, 이에 대하야 서울청년회에서는 오는 16일 오후 8시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산아제한에 대하여 남녀 연합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터이라는데, 이것은 원래 문제부터 중대함으로 일반은 많이 와서 듣기를 바란다더라.’(‘산아제한의 남녀연합대토론’, 조선일보 1924년9월11일)
100년전 경성에서 ‘산아제한’을 둘러싼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청년회가 주최한 이 토론회에선 사회주의 논객 신일용이 찬성, 조봉암이 반대입장에서 논쟁을 펼쳤다. 당시 ‘산아제한’이 뜨거운 이슈였다는 사실이 의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 잡지엔 산아제한을 소개하는 기사가 수시로 실리고, 청년, 사회단체마다 찬반 토론회가 열렸다.
산아제한론은 1920~1930년대 세계적인 이슈였다. 인구 증가 속도가 식량 생산 속도를 앞질러 인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맬서스주의, 우등한 인구를 늘리고 열등한 인구를 줄이자는 우생학의 대두,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내세운 여성주의까지 뒤섞이면서 ‘산아제한’이 인화성 높은 주제가 됐다.
◇한,중,일 방문한 산아제한론자 마가렛 생어
1922년 3월 산아제한론으로 유명한 미국 사회운동가 마가렛 생어(1879~1966)가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키웠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출산 장려를 국책으로 추진해왔다. 일 당국은 당초 생어의 입국을 거부했으나 여론에 밀려 공개 강연 금지를 조건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그의 방문은 동아시아에 산아제한론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생어는 도쿄와 교토, 요코하마에서 의사 및 전문가를 대상으로 산아제한을 주제로 열다섯차례나 강연회를 가졌다. 베이징,상하이, 광저우, 홍콩 등을 찾아가서 ‘산아제한’을 주장했다. 신문화운동 기수였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후스(胡適)의 지원으로 베이징대에서 열린 강연에는 2000명 넘는 청중이 몰렸다. 베이징대 교수 후스가 통역자였다. 생어는 “현재 시급히 과학적 산아제한법을 사용하여 우량한 인종을 양성하고, 양호한 아동을 출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부연락선, 경부선 타고 경성 식당서 강연
생어는 중국 가는 길에 조선에 들렀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넌 생어는 4월 5일 밤 부산 철도호텔에 묵었다. ‘신문기자와 직접 면담하는 게 자유롭지 못하다’면서도 호텔로 찾아간 기자와 인터뷰까지 했다.(’구속많던 일본을 離하야’, 동아일보 1922년4월7일) 매일신보는 생어가 7일 낮 경성식당에서 경성 주재 외국 부인들을 상대로 ‘산아제한강연’을 한다는 기사까지 내보냈다.
◇부유 여성의 향락, 빈민계급의 생활고가 산아제한으로
생어는 이미 이 땅에서도 유명인이었다. 그의 이름으로 ‘정욕, 산아제한의 철학’(조선일보 1921년 6월2일, 4일)이란 글이 실렸다. ‘산아제한’은 신문 사설에도 등장했다. ‘부유계급의 여성들이 산아의 고통과 육아의 번잡을 피키 위하야’ ‘교육비와 생계비에 고통하는 빈민계급이 생계상 불가피의 요구’로 산아제한을 한다면서 ‘인문진화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한 동작계급의 생활고에 수반되는 필연적 욕구요. 필연적 결과라 하지 아니할 수없다’고 썼다.(’산아제한과 산아장려’, 조선일보 1927년7월14일)
이 사설은 산아제한과 산아장려가 아직 조선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선봉사’(祖先奉祀)가 인자(人者)의 가장 중대한 직책이 되고 ‘무후’(無後)가 부녀의 최대 악덕이 되던 전통적 윤리관이 완전히 폐기되고 거대한 외래 재정자본의 지배하에 재래의 가족제도와 사회제도가 급격히 파괴됨에 따라 이 문제는 더욱 더욱 중대화될 것이고…'라고 전망했다.
◇민족 역량 강화와 여성해방 위해 필요
경성제대 병리학실에 있던 이재곤(李在崐)은 민족 역량강화와 여성 해방을 위해 다산(多産)을 막는 산아제한을 주장했다. ‘현금 조선의 경제상태는 극도로 쇠퇴하야 비참한 운명에 이르러있다.대부분의 동포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불량증에 걸리어 있는 듯싶다. 내일 양식이 없는 현실에 있어서 자손만을 자꾸 산출한다 하면 그 말로는 어떻게 되나.’ 이재곤은 ‘생산을 적게하여 우수한 자손을 산출하도록 하고 사망자수를 적게하여 인구의 증가를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산아제한을 내세운다. ‘현대까지 사회는 남성적 독무대였다. 그러나 이후는 여성문화의 부흥시대인 만큼 여자의 해방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선결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자로 하야 자손만을 많이 낳아서 모든 정력을 육아에 집중시키게 하지 말고 자기의 수양도 하도록 부인의 지위의 향상을 사회적으로 도모하여 주어야 한다.’(이상 ‘산아조절사상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3, 조선일보 1935년2월26일)
우수한 자손을 낳아 잘키우자는 ‘우생학’에 대해 당시 사회가 호의적 분위기였음을 알 수있다. 문제는 이런 우생학적 사고가 유전병, 정신질환자, 장애인에 대한 단종(斷種)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일본 의회는 1939년 단종법을 통과시켰다. 조선에서도 1930년대 한센인에 대한 강제불임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윤치호, 여운형, 이광수, 현상윤 등의 조선우생협회 창립
우생학은 1930년대 조선에서 과학이자 사회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 9월 윤치호, 여운형, 유억겸, 주요한, 김성수, 이광수, 현상윤 등 저명한 지식인 85명이 조선우생협회를 결성하고, 잡지 ‘우생’을 출간했다. 전국 곳곳에서 강연회, 토론회를 열어 결혼과 임신, 출산을 우등한 유전 인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고 통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신병자, 정신박약자, 유전성 맹인, 농인을 도태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나치의 우생학을 연상시키는 논리였다. 우생협회를 이끈 인물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대에서 유학한 이갑수였다. 우생협회 발기인 85명중 25명이 의사였다. 과학을 만능으로 여기던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참고자료
이영아, ‘식민지기 여성의 몸에 대한 우생학적 시선의 중층성’, 사회와 역사 제135집, 2022 가을
유연실, ‘근대 동아시아 마거릿 생어의 산아제한 담론 수용: 1922년 마거릿 생어의 중·일 방문을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1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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