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가격'에 짧아진 오픈런 줄... 그래도 샤넬이 웃는 이유 [오픈런 르포]
예전과 달리 1시간 전에 '대기 11번'
3년간 11번 숨막히는 가격 인상 단행
샤넬의 의도적 '손님 떨어내기' 전략?
지난달 30일, 샤넬 오픈런(매장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것)을 하기로 한 D데이가 밝았다. 서울 아침 기온 영하 4도. '얼마나 오래 기다릴까' 추위에 떨며, '재고가 남았을까' 불안에 떨며, 롱패딩으로 무장한 채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잠실점으로 향했다.
오전 9시 도착. 긴 줄을 예상했지만 매장 앞엔 의외로 10명 정도만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뤘던 지난해 샤넬 매장과 비교하면 열기가 확실히 식었다. 오전 10시에 직원이 대기열 등록을 하기까지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오전 9시 이후 오픈런에 뛰어든 추가 인원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기 번호 11번. 그 악명 높던 샤넬 오픈런의 대기 번호는, 보름에 한 번만 매장을 방문할 수 있는 롤렉스의 순번보다 짧았다.
"결혼 예물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주말마다 오픈런을 하고 있어요.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오늘도 (원하는 제품 구매에) 실패했군요."
오픈런에서 만난 직장인 김모(34)씨는 이날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대기열이 줄었다고 해도, 원하는 제품을 사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개점 10분 만에 매장에 들어서니, 인기 제품인 △클래식 플랩백 △탑핸들 플랩백(코코핸들) △보이 샤넬 플랩백 등은 모두 재고가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긴 하지만 볼 수는 없다는 이유로 '유니콘'이라 불리는 아이템이다.
다만 다른 인기 가방들은 바로 살 수 있었다. 클래식 플랩백과 인기 '투톱'을 다투는 2.55 플랩백은 30일과 31일 이틀 연속 모든 사이즈가 재고로 남아 있었다. 샤넬 매장 직원은 "클래식 플랩백도 자주 들어오는 편이라 의외로 쉽게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샤넬백은 이제 경차 한 대 값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던 '샤넬백'의 인기는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가격. 6일 패션·유통업계 등에 따르면, 샤넬은 최근 3년간 총 11차례나 가격을 올렸다. 샤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가방인 '클래식 미디엄 플랩백'은 2020년 715만 원이었지만 지난해 11월 1,316만 원으로 84.6% 폭등했다. 이 가방은 2021년 11월 971만 원에서 1,124만 원으로 가격이 오르며 샤넬백 '1,000만 원 시대'를 열었던 '기념비적인 백'이다. 경차 캐스퍼 승용 모델의 가장 저렴한 트림이 1,385만 원이니, 말 그대로 이제 샤넬백은 차 한 대 값이다.
다른 가방 값도 만만치 않게 올랐다. 보이 샤넬 미디엄 플랩백은 같은 기간 622만 원에서 845만 원으로 35.8% 올랐고, 입문용 모델로 꼽히는 클래식 체인 지갑(WOC) 가격도 298만 원에서 432만 원으로 44.9% 인상됐다.
"휴가 중이던 평일 오후 아무 생각 없이 매장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클래식 플랩백 전 사이즈의 재고가 있더라고요."
너무 자주 가격을 올려서일까. 직장인 김모(28)씨 증언처럼, 한풀 꺾인 샤넬의 인기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지난달 28~31일 나흘간 롯데백화점 본점·잠실점,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신세계백화점 본점·강남점 등을 방문한 결과, 매장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열은 예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픈런의 경우 백화점 개점 한 시간 전에만 도착하면 10~20번대 순번을 받을 수 있다. 평일 오후에는 평균 50명 정도가 입장을 기다렸는데, 대기 없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기다리는 인원만 200명이 넘어 당일 입장을 하기 어려웠던 지난해에 비하면 인기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오픈런 없이도 클래식 플랩백과 2.55 플랩백의 인기 색상인 블랙을 살 수도 있었다.
떨어진 인기에 '마이너스 프리미엄'까지
온라인 분위기도 비슷했다.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KREAM)에 따르면, 클래식 미디엄 플랩백은 최근 한 달간 1,100만 원대 후반에서 1,200만 원대 초반 사이에 거래됐다. 매장가(1,316만 원)에 비해 100만~150만 원 저렴한 수준이다. 2년 전만 해도 온라인에서 200만~300만 원의 웃돈을 줘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업계에서는 샤넬이 가격을 너무 자주 올린 탓에 인기가 시들해졌다고 분석한다. 임금노동자 한 달 평균 급여(2021년)가 327만 원이니, 4개월 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클래식 미디엄 플랩백(1,316만 원)을 살 수 있다. 2020년 두 달 월급(당시 평균 임금 318만 원)을 모으면 살 수 있던 가격(715만 원)과 견준다면, 구매력 대비 가격이 두 배 오른 셈이다. 수년 전만 해도 중산층에게 샤넬은 '인생에 하나쯤 살 수도 있는 명품'이었지만, 이제는 '구매를 포기하게 된 사치품'이다.
직장인 박모(32)씨는 "샤넬백이 로망이긴 하지만 1,300만 원은 너무 비싸다"면서 "다른 명품 가방을 두세 개 살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말했다.
"아무나 샤넬을 가질 수 없다"는 전략
예전만 못한 인기에 샤넬은 당황하고 있을까? 아닌 걸로 보인다. 샤넬은 팬데믹 보복소비 심리가 퍼지던 때, 빠르게 가격을 올리며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뒀다. 2021년 샤넬 매출은 전년보다 54.7% 증가한 156억3,900만 달러(약 20조5,918억 원)였고, 이 중 절반이 넘는 80억6,800만 달러(약 10조6,231억 원)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나왔다.
샤넬코리아도 2021년 매출 1조 원을 돌파했고, 영업이익(2,489억 원)과 당기순이익(1,793억 원)이 전년 대비 각각 67%, 68%씩 급증했다. 업계 관계자는 "물가상승, 본사 방침을 이유로 들긴 하지만, 1년에 몇 차례 가격을 올리는 행태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샤넬이 가격을 올릴 때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는 현상을 예상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샤넬이 '명품 위의 명품'으로 나아가려는 전략을 일부러 택했다는 것이다. 명품 중에서도 '신(神)계'로 불리며 독보적 위상을 굳힌 에르메스처럼,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초고가 명품으로 자리매김하려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샤넬은 팬데믹 기간 명품 브랜드 중 가장 적극적으로 가격 인상을 주도했다.
"샤넬은 궁극의 럭셔리 패션 하우스이며, 시장의 가격 수준에 따라 위치를 잡을(포지셔닝) 필요가 있다."
브루노 파블로브스키 샤넬 패션 부문 최고경영자(CEO)의 말처럼, 샤넬은 고객 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하위 브랜드'와의 뚜렷한 격차를 벌릴 것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포기하진 마, 그래도 꿈은 꾸게 해줄게"
그렇다고 샤넬이 '중산층이 꿈꾸는 명품' 이미지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같은 샤넬 브랜드 안에서도 저가와 고가 제품 사이 선을 확실히 그었다. 이른바 '급 나누기'다. 3년 전만 해도 클래식백과 보이백의 가격 차이는 93만 원에 불과했지만, 이달 기준 471만 원으로 5배 넘게 벌어졌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 "클래식백은 어렵지만 보이백은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꿈을 꿀 여지는 남겨둔 셈이다. 저가 제품은 '수량'으로 희소성을 통제하고, 인기 가방은 '높은 가격'으로 울타리를 쳐, 쉽게 가질 수 없는 샤넬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투 트랙 작전이다. 어윈 램버그 HSBC 수석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를 통해 "샤넬의 가격 인상은 시장 내 경쟁이 아니라 브랜드 가치 제고가 목적"이라며 "샤넬은 모든 사람이 같은 핸드백을 들고 다니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샤넬백 같은 재화는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준다'는 수요 공급의 법칙보다는, 베블런 효과(과시욕 때문에 가격이 비쌀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상품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샤넬처럼 명품화 전략을 구사하는 제품들은 가격을 올릴수록 오히려 사치품 수요를 충족시켜 준다"면서도 "해외여행 등 명품의 대체 소비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 럭셔리 시장의 성장세 자체는 소폭 둔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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