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번의 심장 수술… 그의 칼끝에서 삶과 죽음이 갈라졌다
칼끝의 심장
스티븐 웨스터비 지음|서정아 옮김|지식서가|348쪽|1만9000원
그의 별명은 ‘조스(상어)’였다. 환자들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집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야간 당직 때 더욱 과감해졌다. 어린 환자의 부모 앞에서 “혈액형 검사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하고는, 창자를 들어내고 싹둑싹둑 결장을 잘라내 버렸다. 환자들은 흥미로운 ‘케이스’일 뿐이었고, 선배 의사의 조언은 듣지 않은 채 환자들의 배를 갈랐다. 수술 외의 병원 업무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책상엔 항상 퇴원 요약지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쪽지와 징계 결과 안내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대 시절 럭비 경기를 하다 두개골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내 의식을 찾고 치료를 받았지만, 전두엽이 다쳤을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인 성격 변화를 겪게 됐다. 한순간에 그는 신경질적이고 ‘사이코패스’ 같을 것이라는, 외과의에 대한 편견에 들어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학생. 럭비는 사립학교를 나온 의대 동기들과 멀어지지 않으려고 시작한 취미였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일해온 영국 심장외과 의사 스티븐 웨스터비의 회고록이다. 옥스퍼드 대학 병원 등을 거치며 1만1000건 이상의 심장 수술을 수행한 웨스터비는 한때 사고로 생긴 냉철한 성격을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다. “내 주된 관심사는 그저 묵묵히 손끝을 단련하는 것이었다.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다.” 그는 다른 의사들이 평판을 우려해 맡기를 꺼리는 어려운 환자들을 도맡았고, 심장학 발전에 이정표가 되는 여러 실험적인 수술에 성공했다. 체온을 낮추어 수혈 없이 진행하는 심장 수술에 성공했고, 심실 보조 장치를 사용해 환자를 회생시키는 새로운 기법을 전 세계로 통용시켰다. 유럽과 미국에서 심장 수술 후 사망률이 25%에 달했을 때, 그는 홀로 한 자릿수 사망률을 기록하며 앞서나갔다.
실력은 좋지만 좋은 동료는 못 되었던 웨스터비는 훌륭한 남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직접 운전해서 가면 안 되나?” 심장 수술 집도를 앞둔 그가, 아내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겨우 산부인과에 들른 그는 아내를 확인하고는 사라졌다. “내일 심장 수술이 두 건이나 있어서 잠을 좀 자둬야 해요. 새벽 6시 30분쯤 오겠습니다.” 그는 말처럼 새벽에 돌아왔고,간호사들은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내는 죄인 웨스터비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 환자는 괜찮아? 안 가봐도 돼?” 26시간 동안 혼자 산고를 치르는 중에도 수술실의 남편을 걱정한 아내. 극한 상황의 응급실에서도 요지부동하던 웨스터비의 마음에 순간 공감 능력이 꿈틀댔다. “사라의 이 인류애적인 말은 내 인생관을 바꿔놓았다. 사랑은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날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 진리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16년 수술칼을 놓은 웨스터비는 시상자로 참여한 한 학교의 졸업식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맞닥뜨린다. “환자들을 전부 기억하시나요? 그들이 죽을 때 슬프셨나요?” 저자는 아내의 출산 이후 만났던 소녀 라이마를 떠올린다. 너무나 작은 대동맥을 갖고 태어나 개복 수술이 필요했던 아이. 하지만 수술을 시작하자 심장은 뛰기만 할 뿐 혈액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1분, 2분, 3분… 아이의 생사가 걸린 시간이 흘러갔다. 웨스터비는 순간 비탄에 빠질 아이의 부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낱 같은 희망을 믿고, 당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한 수술 기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병원에 단 한 개 남은 성인용 혈액 펌프를 사용하자, 한 간호사가 물었다. “이 펌프를 꼭 아기에게 썼어야 했어요?” 웨스터비의 머릿속엔 병상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이가 있었다. “그럼 아이를 옳다구나 하고 영안실로 보내요? 그럴 거면 이 일을 왜 합니까?” 그리고 머릿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싫으면 그냥 꺼지든가.” 그렇게 예정보다도 몇 시간이 더 걸려 끝난 수술 덕분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저자는 수술 이후 17년이 지나서야, 소녀를 보내고 수술실에서 느꼈던 과거의 감정을 글로 표현해 낸다. “이 일은 시간과 에너지, 감정 몰입 면에서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나는 이 일에서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 일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웨스터비는 현재 75세. 냉혈한이었던 자신을 더 나은 의사로 거듭나게 해줬던 환자들과의 만남을 추억하며 라이마에게 “각별히 마음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띄운다.건강을 되찾은 환자, 살리려고 했으나 살리지 못한 환자, 그리고 NHS(영국의 국립 의료 제도)의 관심이 있었다면 살 수 있었던 환자들…. 외상외과 의사 이국종 교수가 쓴 의료진의 분투기 ‘골든아워’(흐름출판)처럼, 환자를 살리기 위한 치열한 노력과 죽어가는 이를 지켜봐야만 했던 좌절이 공존한다. 생(生)의 맞은편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 가는 이야기. 원제 The Knife’s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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