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시작은 경청과 설득이다 [동아광장/박상준]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2023. 1. 7. 03:01
연금개혁, 부실채권 정리 등 이뤄낸 고이즈미
끊임없는 호소와 설득에 일본인 마음 움직여
다양한 의견 듣고, 국민 설득해 개혁 이뤄내야
끊임없는 호소와 설득에 일본인 마음 움직여
다양한 의견 듣고, 국민 설득해 개혁 이뤄내야
한국에서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이 그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듯이 일본에서는 한 민간기업이 그해의 유행어를 발표한다. 작년에는 ‘무라카미사마’가 대상에 선정됐다. 일본 야구 역사를 새롭게 쓴 젊은 타자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사람들이 찬사와 애정의 표시로 ‘무라카미사마(무라카미님)’로 부르면서 유행어가 됐다.
2001년에는 특이하게 한두 단어가 아니라 한 정치인의 어록이 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그해 일본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어록이다. 그 어록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겁먹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라는 말이다. 출처는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 표명 연설 중 다음 부분이다. “(개혁의)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득권의 벽에 겁먹지 않고,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먹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의 자세를 관철해 21세기에 어울리는 경제·사회 시스템을 확립해 나가고자 합니다.”
정치인의 연설에서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에 지쳐서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역 없는 개혁’을 외친 고이즈미에게 희망을 걸었고 취임 초기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그러나 개혁의 성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 터진 닷컴 버블의 붕괴는 일본 경제에도 타격을 주었다. 개혁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좀비기업에 대한 대출을 규제하고 재정건전성을 위해 정부의 재정지출을 억제한 결과 부도기업이 속출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결국 국채 발행의 제한 등 일부 공약은 철회해야만 했다. 지지율은 반 토막이 났고, 개혁의 동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취임 초에 약속한 대로 개혁의 방향만큼은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개혁의 절박함을 호소했다. 당시는, 조금 과장을 보태면, TV 시사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 늘 들리는 말이 “부실채권 처리, 연금개혁, 우정(우체국)민영화”였던 것 같다. 논객들은 곧잘 일본을 중병을 가진 환자에 비유하곤 했는데,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측과 먼저 환자의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자는 측이 부딪쳤다. 돌이켜 보면 부실채권과 연금의 경우 당시 개혁하지 못했다면 일본 경제는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됐을 것이다. 우정민영화는 이후 다소 수정을 거쳤지만 고이즈미에게 가장 극적인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2005년 우정민영화법안이 자민당 내부의 반발로 국회(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그 뒤 치러진 총선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언론은 이 사건을 ‘고이즈미 극장’으로 명명했고 2005년 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양적 완화와 엔화 절하, 세계 경제의 회복 등에 힘입어 2003년 이후 일본 경제에 훈풍이 분 것도 고이즈미에게 도움이 됐지만, 부실채권 처리와 연금개혁을 무난히 완수한 것과 개혁을 향한 끊임없는 호소와 설득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였다. 사실 고이즈미가 복잡한 국민연금 체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경청해 개혁의 방향을 잡았고,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 국민을 설득했다.
2004년 일본은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낡은 연금제도는 정부 부채 증가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일본의 여야는 당시 13.58%이던 연금보험료율을 매년 조금씩 올려 2017년 18.3%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라는 제도를 도입해 연금가입자 수와 평균수명의 변동 그리고 경제 상황에 따라 연금의 급부금액이 조정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더 내고 덜 받게 되는,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연금의 고갈 시기를 100년 뒤로 늦출 수 있었고, 연금에 대한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한국에서도 연금개혁이 화두로 떠올랐다. 지금 상태라면 2057년에 연금이 고갈된다고 한다. 2023년의 한국은 20년 전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연금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우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해 옳은 방향을 잡아야 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계에서 가장 부족해 보이는 경청과 설득이야말로 개혁의 출발점이다.
2001년에는 특이하게 한두 단어가 아니라 한 정치인의 어록이 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그해 일본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어록이다. 그 어록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겁먹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라는 말이다. 출처는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 표명 연설 중 다음 부분이다. “(개혁의)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득권의 벽에 겁먹지 않고,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먹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의 자세를 관철해 21세기에 어울리는 경제·사회 시스템을 확립해 나가고자 합니다.”
정치인의 연설에서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에 지쳐서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역 없는 개혁’을 외친 고이즈미에게 희망을 걸었고 취임 초기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그러나 개혁의 성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 터진 닷컴 버블의 붕괴는 일본 경제에도 타격을 주었다. 개혁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좀비기업에 대한 대출을 규제하고 재정건전성을 위해 정부의 재정지출을 억제한 결과 부도기업이 속출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결국 국채 발행의 제한 등 일부 공약은 철회해야만 했다. 지지율은 반 토막이 났고, 개혁의 동력이 약해졌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취임 초에 약속한 대로 개혁의 방향만큼은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개혁의 절박함을 호소했다. 당시는, 조금 과장을 보태면, TV 시사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 늘 들리는 말이 “부실채권 처리, 연금개혁, 우정(우체국)민영화”였던 것 같다. 논객들은 곧잘 일본을 중병을 가진 환자에 비유하곤 했는데,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측과 먼저 환자의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자는 측이 부딪쳤다. 돌이켜 보면 부실채권과 연금의 경우 당시 개혁하지 못했다면 일본 경제는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됐을 것이다. 우정민영화는 이후 다소 수정을 거쳤지만 고이즈미에게 가장 극적인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2005년 우정민영화법안이 자민당 내부의 반발로 국회(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했고 그 뒤 치러진 총선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언론은 이 사건을 ‘고이즈미 극장’으로 명명했고 2005년 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양적 완화와 엔화 절하, 세계 경제의 회복 등에 힘입어 2003년 이후 일본 경제에 훈풍이 분 것도 고이즈미에게 도움이 됐지만, 부실채권 처리와 연금개혁을 무난히 완수한 것과 개혁을 향한 끊임없는 호소와 설득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였다. 사실 고이즈미가 복잡한 국민연금 체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경청해 개혁의 방향을 잡았고,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 국민을 설득했다.
2004년 일본은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낡은 연금제도는 정부 부채 증가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일본의 여야는 당시 13.58%이던 연금보험료율을 매년 조금씩 올려 2017년 18.3%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거시경제 슬라이드’라는 제도를 도입해 연금가입자 수와 평균수명의 변동 그리고 경제 상황에 따라 연금의 급부금액이 조정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더 내고 덜 받게 되는,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연금의 고갈 시기를 100년 뒤로 늦출 수 있었고, 연금에 대한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한국에서도 연금개혁이 화두로 떠올랐다. 지금 상태라면 2057년에 연금이 고갈된다고 한다. 2023년의 한국은 20년 전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연금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우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해 옳은 방향을 잡아야 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계에서 가장 부족해 보이는 경청과 설득이야말로 개혁의 출발점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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