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맘대로 즉각 기업 인수? ‘M&A 판타지’ 비현실적
M&A의 세계
2022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누가 봐도 삼성전자를 떠올리는 순양전자의 반도체 신화가 그렇게 과감하고 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설정을 가지고 출발했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1974년 파산 직전이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전자시계용 IC칩을 생산하며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것은 맞다. 하지만 드라마의 배경인 1987년의 실제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1983년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 육성을 선언한 후, 바로 64K D램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매년 집적도를 높여가며 미국·일본과의 격차를 줄이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 국내 반도체 기업 추가 인수는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는 당연히 드라마라는 특성상 전혀 문제가 될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높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이 검토 중인 영진반도체의 매각에 시한이 있고 그 시한 마지막 날 입국해 바로 인수에 성공한다는 설정은, 극히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통상 M&A는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말이다. 아무리 재벌그룹 회장이 결단을 했다 해도 경쟁자까지 있는 상황에서 단 하루 만에 인수가 확정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까닭이다. 더 큰 문제는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드라마를 완벽한 ‘M&A 판타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드라마상 1996년 시점에 부도처리 된 한도제철을 인수하기 위해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산업에 후발주자였던 순양그룹이 현대그룹을 떠올리는 대영그룹과의 인수 경쟁에서 무리한 승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현실에서는 IMF 금융위기 이후 삼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고, 현대그룹이 한도제철의 실제 모델인 한보철강의 주요 자산을 인수하게 된다. 현대그룹이 한보철강을 인수한 시점은 2004년으로, 한보그룹이 부도난 1997년으로부터 무려 7년 뒤였다. 그 사이 한보철강은 포항제철의 위탁경영과 법정관리를 받았고, 몇 차례 매각이 무산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순양그룹이 자동차 사업의 존망을 걸고 인수를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5조원 이상의 빚을 안고 부도난 회사에 새 주인이 되는 과정이 불과 몇 달 만에 마무리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순양그룹,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대영그룹 간의 아진자동차 인수전도 또 다른 사례로 들 수 있다. 순양그룹이 미라클 인베스트먼트를 헤지펀드로 공격하여 탈락시키고, 정부에 고용승계를 약속하면서 빅딜의 일부로 아진자동차를 인수하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 금융위기 당시 외국계 투자자들이 여론의 공격 대상이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외국계 투자자를 통해서라도 부실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자들이 비난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그들이 막대한 수익을 얻어 한국을 떠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였다. 예컨대 한라그룹의 자동차 부품 업체였던 만도가 1999년 외국계 투자자에게 매각되었을 당시에는 별다른 부정적 여론은 없었다.
홈쇼핑 업체 4989채널을 대영그룹이 인수하는 과정도 비슷한 사례다. 진도준이 대영그룹 회장을 찾아가 물류사업을 혁신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득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경쟁 그룹 회장의 손자와 짧은 만남 이후 전혀 관심도 없던 M&A를 실행한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 진도준이 소유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4000억원 대출의 담보로 보유하고 있는 순양백화점의 지분 30%를 두고 삼촌들과 매각 협상을 벌이는 장면들 역시 매우 부적절하다. 아직 채무불이행 상황이나 기한이익 상실 사유가 발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선 담보로 받은 지분을 판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어 순양백화점 차명 지분 25%를 1400억에 인수하는 계약서를 진도준이 들이밀자, 궁지에 몰린 그의 고모가 마지못해 지장을 찍어 계약을 체결하는 장면도 현실에선 절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밖에도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가진 순양카드를 작은 삼촌에게 매각하는 과정이나, 그 과정에서 담보로 받은 순양물산 지분 2%를 큰 삼촌에게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위와 비슷한 상황들이 계속 반복된다.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오너가 마음만 먹으면 계약서에 지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는 것으로 수천억에서 수조원짜리 M&A가 즉시 종결될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오너 일가가 경영을 하는 것이 맞느냐에 대해 드라마가 던지는 의문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칫 M&A라는 고도의 경영 행위를 희화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치기 어려워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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