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의 인생극장? 잘못된 선택은 없다

유주현 2023. 1. 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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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이프덴’ 주연 정선아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실존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선택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 간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선택이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남의 결정과 환경에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선택의 결과가 좋건 나쁘건, 다시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

이런 난해한 실존주의 철학을 100% 공감할 수 있는 무대가 나왔다. 뮤지컬 ‘이프덴’ 얘기다. 사실 주말에 공연을 예약해 놓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피곤하니 그냥 쉴 것인가, 바지런을 떨 것인가. 휴식을 포기한 대신 깨달음을 얻었다. 판타지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던 뮤지컬이 인생을 사유하게 할 줄은 몰랐다.

160분 중 주연 분량 150분, 화장실도 못가

2002년 18살 나이에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정선아는 데뷔 20주년을 보내고 아이도 낳은 지금이 ‘인생 2막’의 시작이라고 했다. 박종근 기자
그날 만약 편안한 휴식을 택했다면 배우 정선아를 굳이 만나지 않았을 터. ‘이프덴’의 이혼녀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는 정선아는 ‘위키드’의 글린다, ‘아이다’의 암네리스 같은 공주 역할로 각인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변신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2002년 18세 나이로 뮤지컬 ‘렌트’ 주역을 따내며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소녀가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넘겼고, 지난해 아이도 낳았다.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그런데 엄마가 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복귀를 택했다. ‘이프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단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임신 때 77㎏까지 쪘는데 빨리 무대에 서겠다는 목표로 살을 뺐죠. 출산하면 목소리도 변한다길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임신 중에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거든요. 제게 너무 찰떡같은 이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운동도 하고 몸관리도 많이 했어요. 걱정도 있었지만 감히 완벽한 복귀였다고 생각해요.”

‘찰떡같다’는 표현은 그가 연극적인 무대를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지붕 뚫는 고음’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도 컸기에, 두 편의 드라마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프덴’이야말로 “내 꺼다” 싶었단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무대다. 러닝타임 160분 중 주인공 분량이 150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이프덴’은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두가지 삶의 모습을 쉼없이 오간다. [사진 쇼노트]
“그동안 톡톡 튀는 역할을 많이 했고, 제게 원하시는 게 고음 뽐내는 아리아란 것도 알아요. 하지만 배우로서 대사 위주의 드라마적인 작품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이건 연기적으로 끌고 가는 대사를 극강의 고음으로 노래하는 거라 두 토끼를 다 잡은 셈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90% 이상 분량은 처음이고, 이후에도 이런 뮤지컬이 있을까 싶어요. 보통 화장실 갈 시간은 있거든요. 잠깐 앉아서 쉬면서 물도 마시고 소곤소곤 얘기도 할 수 있는데, 화장실은 커녕 아예 옷도 무대 옆에서 갈아입어야 해요. 분량이 워낙 많아서 인터미션에도 대사와 노래를 계속 숙지해야 하고요.”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배우도 바쁘지만, 관객도 방심할 수 없다. 이혼 후 새 삶을 시작하는 엘리자베스가 순간의 선택에 따라 ‘리즈’와 ‘베스’의 삶으로 달라지는데, 두가지 삶이 수십 차례 교차되며 드라마가 전개되기에 관객도 바짝 긴장해야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다른 작품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시잖아요. 캐릭터가 어떻고 둘의 관계가 그렇구나. 그런데 이 작품은 나의 시점으로 보게 되니 어느 한 순간 방관하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실제로 눈을 뗄 새가 없다는 반응이 많고요. 배우로서 이런 현실적인 뮤지컬이 많아졌으면 해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메시지를 드리고, 생각하게 만드는 공연이어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고3 때 처음 본 오디션에서 에이즈에 걸린 스트리퍼 역할을 단박에 따낼 정도로 어떤 역할이든 쉽게 소화하는 정선아는 ‘본 투 비 뮤지컬 배우’로 알려졌다. 그런데 타고난 게 전부는 아니다. 중2 때 ‘브로드웨이 42번가’에 반해 뮤지컬 배우의 꿈을 품은 이후, 꿈을 향해 쉼없이 직진했을 뿐이다. 데뷔 무대에서도 전혀 떨지 않을 만큼 ‘준비된 스타’였다.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안 떨렸어요. 잘하는 걸 보여주게 되니 그저 좋았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으니 떨릴 이유가 없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미친 듯이 뮤지컬에 파고들었으니까요. 그땐 뮤지컬 배우란 직업을 아무도 몰랐어요. 정보도 없던 시절 방배동에 딱 하나 있는 배우 아카데미에 직접 찾아가서 등록하고, 매일 저녁 연습하러 다녔죠. 엄마의 지지도 컸어요. 뮤지컬을 처음 보여준 분도 엄마였고, 배우가 되겠다니 적극 알아봐 주셨죠. 윤석화 선생님이 ‘토요일 밤의 열기’를 처음 들여왔을 때도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고등학생은 원서도 못 내냐고 묻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뮤지컬 ‘이프덴’은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두가지 삶의 모습을 쉼없이 오간다. [사진 쇼노트]
사실 뮤지컬 판에서 무명의 신인이 데뷔부터 주역을 꿰차는 일은 거의 없다. 티켓을 파는 건 실력이 아니라 인지도라서다. “어려서부터 준비가 돼 있어서 기회를 잡은 것 같아요. 오디션에서 10대가 섹시댄스를 추니 놀랍지만, 30살이 춘다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모험하는 제작사가 없어요. 혜성같이 등장하는 신인이 잘 없는 게, 유명한 누군가가 나온다고 해야 티켓이 팔리니까요.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님께 항상 감사드리는 이유죠.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예리한 눈으로 발견하시고 주연으로 세우는 모험을 해 주셨잖아요.”

‘이프덴’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엘리자베스가 공원에서 시위 행렬에 가담할 것인가, 버스킹 공연을 볼 것인가의 사소한 선택에 따라 ‘리즈’와 ‘베스’라는 매우 다른 삶의 경로가 펼쳐진다. 누구에게나 돌이켜 보면 ‘그때 만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순간이 있을 터. 정선아에게도 마찬가지다. “만약 제가 렌트 오디션에 나이가 안 된다고 자신 없어 했다거나, 가 보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좀 늦게 배우가 됐어도 실력이 있으니 잘 풀렸겠지만,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는 못했을지 몰라요.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갔기에 최선의 나를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그는 ‘내가 그때 왜 그걸 안 했지’라는 생각은 잘 안 한다고 했다. 괜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가 선택한 작품이 다 흥행하진 않았지만, 쭉 돌아보면 다 행복했던 지점이 있어요. 흥행 대신 사람을 얻었달지.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정선아를 만든 것이고, 또 앞으로 제가 나아갈 밑거름이 되겠죠. ‘이프덴’의 메시지도 그거예요. 옛날 TV에서 보던 ‘이휘재의 인생극장’과는 달리, 그 어떤 선택에도 좋고 나쁘고가 없어요. 그저 나로부터 시작되는 순간순간의 선택과 사건이 모여 나의 긴 인생이 되고, 책임도 나의 것이라는 이야기죠.”

18세에 뮤지컬 ‘렌트’ 주역 준비된 스타

새침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정선아는 개그맨 뺨치게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든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했고, 무한 긍정의 행복 에너지로 주변의 텐션까지 끌어올렸다. 스스로도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창 ‘천재’ 소리를 듣던 시절엔 교만했고, 한때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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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일을 하니 어릴 때 미친 듯 쫓아다니던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진 것 같았어요. 이른 나이에 꿈을 이뤄 버리고 나니,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더라구요.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어릴 때 교복 입고 연습실에 가서 새벽까지 열심히 하던 내가 꿈꾸던 미래가 그냥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달까요. 내 꿈이 고작 얼마의 돈이 되고, 페이를 더 받으려고 작품을 선택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발견한 건 ‘감사’라는 키워드였어요. 내가 이런 끼를 받았고, 이렇게 멀쩡하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게 모든 해결의 열쇠였어요. 그러고 보니 나를 도와주는 스태프에게도 감사한 줄 모르고 혼자 우쭐해 살았더군요. 계속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다행히 저는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감사 표현도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그는 지나간 이야기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고 싶다”면서 자신의 대표작도 지금 하고 있는 ‘이프덴’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렌트’는 지나간 첫사랑이었을 뿐이다. “이프덴을 만나기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결혼, 출산으로 인한 몸의 변화, 환경의 변화가 생기면서 여러 선택을 해야 했죠. 앞으로도 많은 갈림길이 있겠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안 할 거예요. ‘이프덴’의 메시지처럼,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무대에서도 행복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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