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개 같지 않은 개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겪은 크나큰 변화 중의 하나는 바로 견공들의 엄청난 신분 상승(?)이 아니었나 싶다. 그 사이 견공들의 생활 여건은 먹이에서부터 침식 거주 환경이나 심지어 건강관리에 이르기까지 큰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인 차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인 사람과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른 차원이 된 것이다. 단순한 가축 중의 하나에서 애완견으로 그리고 다시 반려견으로 바뀐 것이다. 농담이겠지만 어떤 견공은 사후 영생의 길도 얻었다고 한다. 신부님은 신앙이 깊은 부자 마나님이 자기가 천당에 갈 때 사랑하는 개도 함께 가야 한다고 조르는 것에 못 이기고, 정 싫으시다면 개신교로 가겠다는 위협(!)에 설득되어 개에게 영세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부님이 이 문제에 관하여 주교님에게 고해를 청하자 기가 막힌 주교님의 답이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견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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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서 견공들 엄청난 신분 상승
어떤 탈북자는 “개들이 너무 호사”
견공 입양 모습 아름답긴 하지만
고아 입양 감소 소식에 안타까워
」
다른 가축과 달리 개는 작은 보살핌에도 주인에게 일방적이고 무한한 애정과 충성으로 보답한다. 온몸, 온 마음의 무한한 투자를 요구하는, 그리고도 배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무한한 충성을 일방적으로 떼어 바치는 견공을 좋아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 그 무지몽매한 헌신을 멸시한 것인가.
역대의 독재자 중 개에게 애착이 많은 사람이 흔히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도 그중의 하나이다. “내가 사람들에 관하여 알게 될수록 더욱더 내 개를 사랑하게 된다(Je mehr ich von den Menschen sehe, umso liber Ich meinen Hund).” 당시 후진국이던 프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든 대왕은 배신을 잘하는 사람들보다 개에 애착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Master and Margarita)’에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지 개를 사랑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어려운 군인 생활의 결과로 사람에 대한 염증에 빠진 총독은 심문을 하고 있는 죄인에게 자신의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한편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 화를 내고 예수님에게 태형을 내린다. 현 북한 통치자의 부친 김정일도 애완견을 무척 사랑했다. 그는 개 이외에 다른 애완동물들도 좋아했는데 특히 개를 좋아해서 출장 중에도 총애하는 개를 못 잊어 통화라도 하려고 무리한 노력을 했다고 들었다. 일본의 에도 시대 쇼군 쓰나요시도 개를 좋아해서 누구든지 개를 잘 돌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정서나 신뢰를 공유하는 데 실패한 독재자들이 메마른 심경에 그나마 정을 기울일 수 있는 상대로 개에 집착한 것일까.
지나친 비약인지 몰라도 탈북민의 비판적인 소감에 담긴 “개 같지 않은 개”에 대한 집착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메마르고 적대적인 정서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것은 또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와도 어떤 관계가 있을지 생각이 간다. 각박한 현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저해하고 결혼과 육아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가?
끝으로 입양견에도 생각이 미친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견공들을 입양해서 함께 자애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사진들을 흔히 대한다.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그런데 조금 유감이 남는다. 국내에서 고아를 입양하는 경우가 근래에 매우 감소한다는 소식이 있다. 물론 출산율의 저하가 근본 원인이겠지만 다른 원인들도 있다고 한다. 입양을 하는 경우 외부의 관심사가 되고 특히 제약과 통제 등이 어려워 입양을 꺼린다는 것이다. 견공들을 입양해 함께 잘 지내는 것도 좋은 광경이지만 혹시 고아들을 입양해서 좋은 가족을 이룬다면 더 좋은 모습이 아닐까 한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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