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렘브란트는 거울을 봤다.
언제 감았는지 머리카락에는 기름기가 가득했다. 푹 팬 두 눈, 볼살이 쑥 들어간 두 볼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렘브란트는 거울 앞에서 눈을 부릅떴다. 인상도 쓰고, 허리도 바로 세워봤다. 거울 속 모습은 변함없이 초라했다. 볼품없는 늙은이였다. "어쩔 수 없군." 렘브란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거울을 쓱 보고, 캔버스에 붓을 갖다 댔다.
렘브란트는 자화상 그리기에 몰두했다. 그는 온갖 수모를 겪고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붓질을 하며 오만 상념에 젖었다. 가끔은 자신이 딱하다고 생각했다. 거미줄이 쳐진 창고 같은 이 집이 감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렘브란트는 그럴 때마다 억지웃음으로 울음을 눌렀다. 웃음이 끝내 안 나올 땐 엄지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렘브란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종종 화구(畵具)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모자는 색이 빠져 누런색이었다. 늘어진 외투가 펄럭였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는 바닥을 쓸었다. 부랑자 같았다. 인내심이 좋은 이도 그가 뿜어내는 먼지 냄새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렘브란트도 별 미련이 없었다. 그는 한참 전에 생의 의지를 잃은 빈 껍데기 같았다. 곧 꺼질 촛불처럼 보였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태였다.
"그걸 믿으라고?"
렘브란트가 사는 고요한 이 마을에도 언젠가 어수선한 공기가 깔린 적이 있다. "잘나가는 귀족도 한나절 줄을 서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그 노인이?" 몇몇 사람들이 선술집에 모여 숙덕였다. "글쎄, 손수건만한 그림 한 점 값이 보통 사람의 일 년 치 품삯이었다고 하는구먼." "농담도 참!" 사람들이 호쾌하게 웃었다. 다들 맥주를 꿀떡꿀떡 마셨다. "저택 주인에, 부인은 깜짝 놀랄 미인이었다고…." "그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소문을 늘어놓는 이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며칠 전 시내에 갔는데 말이야. 한 사내가 우리 마을 이름을 듣곤 말하더구먼. 거기 렘브란트가 있는 곳 아니냐며." "노인 이름이 렘브란트인 점도 맞고, 작업 화가라는 점도 맞지만…. 그만큼 대단한 분께서 왜 그러고 살겠어. 말이 안 되잖나." 다들 수긍했다. "자네가 촌스럽게 하고 다니니 대충 지어내서 골려줬네!" "그, 그렇지?" 이 남자는 그제야 뒤통수를 긁적였다. 술렁이는 분위기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가 들은 말은 모두 진짜였다.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던 라인강변에 자리 잡은 밀 방앗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다. 게다가 9남매 중 막내였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사랑둥이로 살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부족함 없이 컸다. 동네에서 똘똘한 아이로 통한 그는 14살 때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렘브란트는 그제야 방황했다. 어디서 바람이 들었는지 그때부터 계속 그림을 끄적였다. 렘브란트의 부모는 그런 막둥이를 지켜봤다. 뭐하냐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기엔 그의 그림에서 빛이 났다. 전형적인 미술 천재였다. 좋은 그림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렘브란트는 대학을 그만뒀다. 부모의 도움을 받은 그는 유명 화가였던 스바넨뷔르흐 밑으로 들어갔다. 3년간 수업을 받았다. 스승의 캔버스와 물감 준비, 작업실 청소도 도맡았다. 렘브란트는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에게 6개월간 그림을 또 배웠다. 렘브란트는 어딜 가도 최고였다. 스승보다 낫다는 평을 수시로 들었다. 잠시 고향으로 간 렘브란트는 1631년에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왔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도시에서 살게 된다.
청춘의 렘브란트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의 그림은 그가 봐도 끝내줬다. 눈썹과 수염, 작은 주름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는 게 없었다. 재능과 실력에 취한 렘브란트는 그쯤부터 자기 작품 서명으로 세례명인 '렘브란트'만 썼다. 시크한 인증 마크였다. 사실 렘브란트의 진짜 이름은 '하르멘스존 판 레인(Harmenszoon van Rijn)'이다. 그의 부친 이름 '하르멘스존', 집안의 방앗간이 라인강변에 있어 만들어진 '판 레인'을 엮은 것이다. 자신을 세례명으로만 표현하는 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와 스스로를 동일시한 격이었다. 전설의 4인방처럼 본명 아닌 세례명으로 알려지기를 바란 셈이다.
"어이, 서명이 이게 다야? 왜 라파엘로 흉내를 내?" 누군가 묻는다면 렘브란트는 이렇게 답했을 터였다. "나도 그 사람처럼 그릴 줄 아니까." 당시 네덜란드의 사회적 분위기는 이 당돌한 화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이긴 네덜란드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고위층은 물론, 국민도 더는 걱정할 게 없어 문화예술에 함께 관심을 가졌다. 구멍가게를 둔 주인도 내부에 그림 한두 점을 내걸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온 직후 자화상 한 점을 그렸다.
쌍꺼풀이 짙은 두 눈은 당당하다. 옅은 미소, 환한 혈색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멋스럽게 얹은 모자가 자신감을 더한다. 그 시절 렘브란트가 즐겨 입은 검은색의 벨벳 망토는 비싸고 귀한 옷이었다. 흰색 러프 또한 부잣집만 쓰는 흔치 않은 장식품이었다. 그는 여기에 금장 단추까지 달았다. 렘브란트는 젊은 날의 성공을 한껏 즐겼다. 돈과 인기, 불장난 같은 사랑놀이에 파묻혔다. 놀라운 건 그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친척과 이웃, 종교와 역사 등을 소재로 꾸준히 붓을 들었다.
렘브란트는 신들린 것 같았다. 그저 휙휙 그을 뿐인데도 작품이 탄생했다. 렘브란트는 유학을 갈 필요도 없었다. 청운을 품은 예술가 모두가 이탈리아로 떠날 때도 가만히 있었다.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더는 배울 게 없었다.
특히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가 즐겨 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열하는 기법)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죽하면 "미켈란젤로가 살아서 돌아온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렘브란트는 그 시대 예술가 중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명성이 쌓였다.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 전역에 이름이 퍼졌다. 미술 애호가 모두가 그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다. 추종자도 넘쳐났다.
"이런 그림, 살면서 처음 본다!"
1632년. 렘브란트의 그림을 받아든 암스테르담 의사협회 사람들은 감격에 말을 잃었다. 인류사상 처음 보는 형태의 단체 초상화가 등장했다. 이 그림은 훗날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는다. 렘브란트는 기막힌 영화 포스터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단체 초상화란 결혼식 하객 대하듯 일렬로 줄 세운 뒤 그려줘야 한다'는 불문율을 시원하게 깨버렸다. 렘브란트는 튈프 박사와 사체 사이에 빛을 표현했다. 이 빛이 닿는 모든 인물을 개성 있게 담았다. 그 누구도 식상하거나 밋밋하게 그리지 않았다. "우린 그저 얼굴만 제대로 나와도 만족했을텐데, 모두를 사연 있는 성인(聖人)처럼 표현했군!" 의사들은 환호했다.
렘브란트는 결혼도 잘했다.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소문난 미녀였다. 귀족 혈통으로 기품과 교양도 갖췄다. 특히 주목할 건 사스키아의 경제력이었다. 이웃 도시 시장의 딸인 그녀는 결혼 지참금 4만길더(지금의 약 40억원 규모)를 챙겨왔다.
렘브란트는 다 이뤘다. 이제 그의 경쟁자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거장들이었다. 돈에 사랑까지 부족할 게 없었다. 아내 덕에 신분도 올랐다. 렘브란트는 그 시기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렘브란트는 넋 놓고 웃고 있다. 옷과 모자, 장신구 모두 화려하다. 선술집에서 술잔을 든 채 잔뜩 들떠있다. 사스키아는 그런 렘브란트의 무릎에 조신히 앉아있다.
"저 인간, 또 왔네. 오늘은 재미 없겠어."
1639년. 서른셋의 렘브란트가 경매장에 거드럭거리며 등장했다. 그를 알아본 이 모두가 탄식했다.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가 연단에 올랐다. "이번 물품은 그리스 조각상인데…. 벌써 입찰하시는 건가요?" 렘브란트가 손을 들었다. 그는 최저 입찰가와 견줘볼 때 말도 안 될 '뻥튀기' 가격으로 물품을 쓸어갔다. 옷, 가구, 도자기, 이역만리에서 왔다는 골동품과 동물 박제까지 한 아름 안은 채 돌아섰다. "저, 저 경매중독자…." "돈을 이렇게까지 주고 다 사서 뭐 한대요?" "집에 모셔둔다던데. 집이 웬만한 박물관보다 낫다더군."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댔다.
이쯤 렘브란트는 '플렉스(Flex·부 과시하기)'에 몰두했다.
돈은 얼마든 벌 수 있었다. 초상화 한 점을 그리면 500길더(약 5000만원)를 벌었다. 주문은 장부를 가득 채울 만큼 밀려 있었다. 일타 강사가 된 렘브란트는 한해 그림 수업비로 100길더(약 1000만원)를 받았다. 줄을 선 화가 지망생도 수백명이었다. 여러 점 찍어낼 수 있는 판화 또한 웬만한 유명 화가의 유화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최고 노른자 땅에 있는 집을 샀다.
렘브란트는 1만3000길더(약 13억원)짜리 지상 3층, 지하 1층 저택에 입성했다. 그 자리에서 돈을 다 낸 건 아니지만, 그의 미래를 보면 잔금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옷과 액세서리를 사들였다. 패션에 관심이 컸던 그는 옷장에 옷을 쌓아뒀다. 넓은 집을 채울 사치품도 사 모았다. 경매장을 뻔질나게 찾았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마를 내서라도 갖고 왔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릴 때 말곤 돈을 뿌리면서 살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젊었다. 인기는 여전했다. 신흥 부자들은 계속 생겨났다. 무엇보다 현명한 사스키아가 항상 뒷감당을 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영광은 근 10년 정도였다. 그의 영예는 뜻밖의 일을 맞고 처참히 짓밟히게 된다.
렘브란트의 작품 '야경'(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단체 초상화)이 몰락의 도화선이었다.
1642년께 렘브란트의 유명세는 최고조에 올랐다. 그는 민병대 대장인 프란스 바닝 코크에게 집단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그려주면 1600길더(약 1억6000만원)를 주겠다고 했다. 렘브란트는 승낙했다. 사실 렘브란트는 꿍꿍이가 있었다. 이미 이룰 건 다 이룬 렘브란트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정점에 선 사람이 그렇듯, 나밖에 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고픈 욕망이 들끓었다. 어쩌면 라파엘로, 티치아노와 비견되는 영광을 넘어 그들마저 뛰어넘은 신(神)으로 기록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바벨탑을 쌓다가 벌을 받은 것처럼, 렘브란트도 그 자신감에 외려 역풍을 맞고 만다.
"우리가 이 그림을 위해 돈을 얼마나 냈는데!"
렘브란트가 다 그렸답시고 건넨 작품 야경에 주문자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돈을 냈다. 그런데 누구는 옆모습만 보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앞사람 팔에 가렸다. 엉뚱한 시선, 경박한 표정, 어딘가 튀는 자세로 그려진 민병대원도 다수였다. 아예 어둠에 갇혀 얼굴조차 안 보이는 병사들은 "나는 어디에 그려져 있냐고!"라며 격분했다. 알지도 못하는 상상의 인물이 자신보다 더 잘 표현된 걸 알게 된 이들은 "쟤는 누군데!"라며 격노했다.
렘브란트는 수정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끝내 고쳐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전에 없던 작품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때 민병대원들은 되레 고마워해야 했다. 이들의 반발은 적반하장처럼 느껴졌다. "미술 작품은 작가가 끝났다고 한순간 끝난 것이다." 이 답변으로 끝이었다. 훗날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가장 위대한 그림, 무대적 장치를 끌어들인 전대미문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건 그냥 그림이 아니고 단체 초상화였다. 엄청난 돈을 받은 주문작이었다. 거금을 날린 당사자들의 분노는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렘브란트를 얄밉게 보던 이들은 이때다 싶어 소문을 냈다. 쟤한테 그림 잘못 의뢰하면 피본다는 말이 퍼졌다. 신용이 최우선이었던 그 시대에 이런 악명은 치명적이었다.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왔듯, 불행도 한 수레에 같이 실려왔다.
소년등과(少年登科)의 비극이 시작됐다. 그쯤 렘브란트는 자신의 안전판 역할을 한 사스키아를 잃었다. 폐결핵이었다. 이들 사이의 다섯 아이 중 네 아이도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가 없는데도 돈을 펑펑 썼다. '야경 사태' 이후 그림값도, 의뢰 건도 뚝 떨어진 렘브란트는 적자의 늪에 빠졌다. 사치욕을 못 버린 그는 적자 폭을 키워갔다. 하녀와의 추문으로 종교위원회에 끌려가는 수모도 겪었다. 그래도 렘브란트는 살아날 수 있었다. 보다 너그러워지든, 그림 스타일을 바꾸든 얼마든 회생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시를 받은 양 자기 스타일을 고수했다. 똥고집도 이런 똥고집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본 렘브란트는 오만했다. 결국 이번에도 세상이 굴복할 것으로 확신했을 수도 있다. 이제는 그의 길이 위대했음을 알지만, 그때는 기름통을 들고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늘 렘브란트에게 손을 내밀어준 세상도 그를 내쳤다. 네덜란드의 경제 상황이 차츰 나빠졌다. 화려한 로코코 풍 그림이 유행했다. 렘브란트는 잠깐 운 좋았던 한물간 화가로 취급받았다. 그의 화풍은 구닥다리로 받아들여졌다. 1652년에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공허해 보인다. 눈빛은 생기를 잃었다. 턱살은 힘없이 늘어졌다. 알록달록한 옷도, 장신구도 없다. 맥줏집에서 만나 술을 사면 여러 서글픈 사연을 들려줄 듯하다.
"파산 신청하러 온 게 맞습니까."
"네." 1656년. 법원을 찾은 쉰 살의 렘브란트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렘브란트는 멈춤 없이 내리막길을 굴렀다. 정신 차려보니 나락이었다. 젊은 날을 돌아봤다. 지금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렘브란트는 저택의 잔금을 치르지 못했다. 결국 경매장에 넘어갔다. 그간 사들인 수집품도 다 포기했다. 마지막 희망으로 미술품 경매회사를 세웠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묘지 터도 팔았다. 꿋꿋하던 그가 이 순간에선 땅을 치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이젠 저주가 된 그림을 끝내 놓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드문드문 들어오는 의뢰에 응했다. 작품 대부분은 "크기가 안 맞다"는 등 핑계로 잘리고 찢기는 등 굴욕을 겪었다. 얼굴에 침을 맞는 것보다 모욕적인 일이었다. 렘브란트는 의뢰가 없을 땐 거지와 부랑자 등 내몰린 이들을 즐겨 그렸다. 힘없고 약한 동물도 캔버스에 자주 담았다. 딱한 처지에 놓인 렘브란트는 이들과 연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663년. 부부처럼 살던 또 다른 여인 헨드리케가 죽었다. 사스키아가 남긴 아들을 키워줬던 그녀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1668년에는 사스키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 티투스도 잃었다.
같은 해 렘브란트는 새로운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 속 렘브란트는 웃고 있다.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고서, 볼품없는 모습을 한껏 드러내고선 히죽대고 있다. 그는 분명 헤실대고 있지만, 보는 이는 배경지식 없이도 처연함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을 화가 제욱시스로 표현했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못생긴 노파가 "나를 비너스처럼 그려주쇼!"라고 하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었다는 신화 속 인물이다. 렘브란트는 치기 어린 시절의 패기, 끝내 꺾지 않은 신념 등을 돌아보다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한때 모든 것을 가졌던 그에게 주어진 건 늙음 뿐이었다.
티투스를 떠나보낸 뒤 렘브란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생의 결정타를 맞은 렘브란트는 일 년 뒤 63살 나이로 죽었다.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렘브란트를 예우한 이는 없었다. 볼품없는 노인네의 죽음일 뿐이었다. 렘브란트는 가난뱅이 시신들과 함께 묻혔다. 그의 유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렘브란트는 그렇게 역사에서 허무하게 지워졌다. 자화상 100여점, 유화와 판화 등 2000여점 작품도 주목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렘브란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이름은 더 오래 묻혔을 수도 있다.
렘브란트에 심취한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어둠을 완전히 극복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빛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나아간 나머지 짙은 어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2)미녀만 보면 그리려고 안달났다, 왜 그랬나 보니[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3)“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6)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7)“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8)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9)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영원한 라이벌 (2022. 9. 10.)
10)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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