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민, 널 믿을게” 벤투 뚝심 유지, 선수들 결속 강해졌다

정영재 2023. 1. 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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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코치의 ‘벤투호 1500일 항해일지’
파울루 벤투 감독과 4년4개월의 동행을 마무리한 최태욱 코치는 “감독님의 전술과 선수 기용에 대해 밖에서 흔들수록 대표팀 내부의 신뢰와 결속은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2022 FIFA(국제축구연맹)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16강으로 이끈 파울루 벤투(54·포르투갈) 감독이 본국으로 돌아가던 날, 이 냉철한 승부사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최태욱(42) 코치와 작별 포옹을 하는 순간이었다. 2018년 8월 부임해 2022년 12월 월드컵을 마칠 때까지 4년4개월 동안 벤투의 곁을 지킨 사람이 최 코치였다. 대표팀 코칭스태프 중 유일한 한국인이자 2002 한일 월드컵 4강 멤버로서 그는 선수들과 벤투 사단 사이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500일이 넘는 긴 항해를 끝내고 벤투호에서 내린 최 코치는 모처럼 가족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위기도 있었고 외부에서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수록 벤투 감독님은 자신의 축구 철학을 뚝심 있게 유지했고, 선수단 내부의 신뢰와 결속은 강해졌다”고 말했다. 최 코치는 “매력 있게 이기고 싶어한 벤투 스타일을 끝까지 믿어주신 정몽규 축구협회장께 감사드린다. 선진 대열에 합류한 한국 축구가 뒷걸음치지 않으려면 후임 감독을 잘 뽑아야 하고 대표팀에 대한 지원도 좀 더 촘촘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라질에 맞장 뜨는 벤투 축구에 확신

Q : 1500일 항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A : “2019년 11월 아랍에미리트에서 브라질과 맞붙었을 때다. 0-3으로 졌지만 점유율·슈팅수 등이 대등했다. 세계 최강과 중립지역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선 수비 후 역습’으로 갈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맞장을 뜨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벤투 축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Q : 벤투 감독 첫인상이 어땠나.
A :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선수만 생각하고, 선수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다. 운동장에서만 좀 강하시고, 특히 심판에게는 되게 강하다(웃음). 일하는 방식은 내가 만난 지도자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었다. 코칭스태프의 역할 분담이 명확했고, 시너지 효과도 컸다.”

Q : 훈련할 때 특징적인 모습을 꼽자면?
A : “체력훈련 때 규격과 간격을 매우 중요시 한다. 위치추적장치(GPS)가 부착된 전자성능추적시스템(EPTS)을 착용한 선수들이 훈련이 끝나면 활동량·맥박수 등을 체크한다. 전날 좀 강한 훈련을 했다고 하면 당일 패스 연습 때 선수간 거리를 1m라도 줄이라고 하고, 훈련 장비 무게에도 신경을 썼다.”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 2-3으로 분패한 뒤 벤투 감독이 손흥민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카타르 월드컵 멤버가 확정될 때까지 축구팬들의 관심은 이승우(25·수원FC)와 이강인(22·마요르카)에게 쏠렸다. 이승우는 2019년 1월 아시안컵에서 계속 경기에 못 나가자 물병을 걷어찼다. 그 후 벤투호에서 사라졌고 카타르에도 가지 못했다.

이강인도 2021년 3월 제로톱(미드필더에게 최전방 역할을 맡기는 전술)으로 나선 일본전에서 0-3 완패한 뒤 강하게 어필했다가 벤투 눈밖에 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강인은 막판 벤투호에 승선했고, 카타르에서 ‘게임 체인저’로 큰 역할을 했다.

Q : 이승우 ‘물병 사건’을 돌이켜 보면?
A : “어느 선수나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감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거다. 그것 때문에 감독님이 이승우를 안 뽑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승우는 지난해 K리그로 돌아와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경쟁자보다 월등했던 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월드컵에 갈 수 있었다고 본다.”

Q : 2021년 ‘이강인 항명’ 얘기도 있는데.
A : “당시 급하게 한일전이 잡혔고, 유럽파 중에선 이강인만 힘겹게 요코하마에 왔다. 강인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을 고민하다가 제로톱으로 갔는데 강인이 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안 됐다. 강인이가 경기 후 라커룸에서 불만을 터뜨렸다는데 그런 장면은 본 적이 없다.”

Q : 이강인에 대한 벤투의 본심은?
A : “이강인이 좋은 선수고 장점이 뭔지는 다 알고 있었다. 황인범(27·올림피아코스)처럼 미드필드에서 활동성이 좋은 주축 선수를 이겨내야 기회가 열리니까 감독님이 기다려주셨던 것 같다. 가장 큰 약점이 공수 전환, 즉 공격 실패 후 수비 가담이었는데 강인이가 그걸 극복했다. 가나전에서 공을 뺏긴 뒤 곧바로 탈취해 크로스를 올려 조규성 헤딩 골로 연결시킨 장면이 바로 그거다.”

Q : 선수들이 감독을 ‘벤버지’라 불렀나.
A : “그건 아니고 ‘우리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9월 감독님이 ‘재계약이 결렬됐다. 돈 문제가 아니라 계약 기간 문제’라고 통보했다. 사우나에서 고참 선수들이 ‘저희들이 감독님한테 남아 달라고 사정해도 안 될까요’ 하기에 ‘감독님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분이다’고 얘기해 줬다. 선수들이 후임 관련 소문을 들었는지 ‘우리 축구가 이렇게 발전이 됐는데, 어떻게 해야 경기를 이길 수 있는지 알게 됐는데…’ 라면서 한숨을 쉬더라.”
황희찬 부상 보고 전임 닥터 필요 절감

벤투 감독(가운데)이 훈련 중 선수단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오른쪽 둘째가 최태욱 코치. [연합뉴스]

Q :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불과 3주 앞두고 주장 손흥민(31·토트넘)이 안와골절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마스크 투혼’을 발휘했지만 본인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답답했다. 최 코치가 당시를 회고했다.
A : “얼굴 다쳐본 선수는 트라우마 때문에 실전 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나도 이마를 40바늘 꿰맨 적이 있는데 상처가 아문 뒤에도 상대 축구화가 얼굴 근처에만 와도 공포가 훅 밀려왔다. 다친 지 얼마 안 된 흥민이는 헤딩까지 할 정도로 자신을 희생했고, 그걸 보면서 동료들이 더 죽기살기로 뛰더라.”

Q : 벤투 감독은 어땠나.
A : “아무리 주축 선수라도 결정적인 찬스를 계속 놓친다면 교체하고 싶을 거다. 그런데 감독님은 ‘네가 정말 힘들어서 빼 달라고 할 때까지 나는 널 믿겠다’고 약속하셨다. 결국 16강행을 이끈 포르투갈전 결승골이 흥민이 발에서 나왔다. 그 패스는 ‘쏘니’ 아니면 할 수 없는 어시스트였다. 팀의 에이스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배웠고, 축구 인생을 걸고 희생정신을 발휘한 흥민이한테도 감동을 받았다.”

Q : 가나전 두 골로 스타가 된 조규성(25·전북 현대)이 사고를 칠 것 같았나.
A : “감독님이 ‘너는 침투력·제공권·결정력 다 좋다. 볼 키핑과 연결만 잘 해주면 된다’고 하셨다. 나와 마이클 김 코치도 같은 얘기를 하면서 ‘규성이는 나이도 어리고 군대도 갔다 왔고 인물도 좋으니 월드컵 때 잘 하면 대박 날 거다’고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터졌다. 우루과이전에 교체 투입돼 뛰면서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

Q : 포르투갈전 결승골 주인공 황희찬(27·울버햄튼)은 부상으로 힘들어했는데.
A : “월드컵 직전 소속팀에서 햄스트링(넓적다리 뒷근육)을 다쳤다고 해서 재활을 하다가 훈련에 합류했는데, 첫 경기 이틀 전에 또 다쳤다. 부상 부위 MRI(자기공명영상)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포르투갈전도 힘들다고 봤는데 경기 뛴 것도, 골 넣은 것도 기적이다. 대표팀 닥터가 대회마다 바뀌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전임 닥터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케이스다.”

Q : 2002년 히딩크 사단 선수였고 2022년 벤투호 코치였는데, 20년 동안 한국 축구가 어떻게 바뀌었나.
A : “2002년 이후 다섯 번 월드컵 나가서 두 번 16강에 오르지 않았나. 경기력으로 봤을 땐 한국 축구가 변한 게 없었다고 본다. 한국 특유의 스타일로 강팀을 만나면 ‘선 수비 후 역습’ 이거였는데 벤투 감독님이 좀 바꿔 놓으신 것 같다. 정말 우리가 하려는 걸 하면서 이기는 것, 이걸 앞으로 더 발전시켜야 한다.”

Q : 그래서 벤투 후임이 더 중요한데.
A : “축구협회에서 많은 고민을 하겠지만 선수들과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어떤 축구가 대세인지 알고, 최상급 감독도 경험한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이런 감독이 필요합니다’라는 말도 좀 들을 필요가 있다.”

Q : 앞으로 계획은?
A : “히딩크와 벤투 감독님한테 배운 것들을 잘 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팀을 만들고 싶다. 20년 뒤엔 대표팀 감독을 맡아 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게 목표다. 선수와 코치로서 월드컵 16강을 경험했으니 감독으로서도 기록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최태욱. 부평고 동기 이천수가 “태욱이를 이기려고 이를 악물었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측면 공격수였다. 빠른 발과 돌파력, 슈팅력을 갖췄다. 2001년 11월 서울월드컵경기장 개장기념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중거리포를 터뜨려 ‘서울월드컵경기장 1호골’의 주인공이 됐다. 2002 월드컵 때는 부상 때문에 3-4위전에서 10분 뛴 게 전부였다. A매치 29경기 4골, K리그 통산 313경기 37골-50도움을 기록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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