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다시 “자력갱생·간고분투”…고단한 주민 삶은 ‘해방’될까

한겨레 2023. 1. 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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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반도 어디로 ② 북한의 생존전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6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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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한국 대중문화의 키워드 중 하나는 ‘해방’이었다. 서울 변두리에서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해방’ 분투기를 그려낸 텔레비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JTBC)가 화제이더니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과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에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대중문화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흥미롭지만 주인공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무자비한 권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현실의 비루함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은 한번도 충분히 “채워진 적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이데올로기만 쫓아왔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빨치산 아버지는 평생 주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으로 나름의 ‘해방’을 이뤄내려 한다. 오랫동안 ‘해방’이 가리켰던 무겁디무거운 정치적 의미가 ‘지금-여기’에서는 파편화된 관계의 연결을, 망가져 버린 인간성의 회복을 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민들의 삶’ 빠진 전원회의

한국의 거울상인 한반도 북쪽에서도 ‘해방’은 중요한 화두임이 분명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분단 이래로 북한에서의 ‘해방’은 그 의미망이 확장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만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는 뜻이다. 예컨대 북한한테 한국전쟁은 ‘미국의 식민지 지배 위협으로부터 조국의 해방을 지켜’내기 위한 ‘조국 해방전쟁’이며, 김일성 수령의 권위가 절대적인 까닭은 ‘항일혁명을 통해 인민 해방을 이뤄냈다’는 데 있다. 공화국 창건 75주년이 된 2023년까지도 국가 건설의 기본 근간으로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주적인 국가에서 살아가는 북한의 인민들은 ‘해방’된 까닭에 행복하다고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토록 외세로부터의 자유에 골몰해온 북한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외세에 포박되어 버렸다. 지난해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압도적 군사력 강화”를 강조하지만 인민 생활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 계획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미제국주의의 강권과 전횡, 대조선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력 강화에 매달릴수록 인민들의 살림살이 개선에 투여되는 국가 자원은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2013년 김정은 체제가 천명한 핵·경제 병진노선은 2018~2019년 대화 국면에서 잠시 경제 발전으로 균형추가 옮겨갔다가 2021년 당대회에서 자력갱생 경제 건설로 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외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결국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특히 이번 전원회의에서는 핵무력 강화를 강조하면서 경제 부문에서는 인민들이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이겨낼 것을 독려하고 있다. 식민과 전쟁, 그리고 냉전이 중첩된 한반도에서 북한이 ‘해방’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인민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전가되었는지 확인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해방된’ 북한 인민들은 ‘기꺼이’ 이 상황을 감내할 것인가? 탈냉전과 식량난, 거기에 시장화까지 본격화된 지난 수십년의 변화를 겪은 인민들은 여전히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이겨낼 의지가 있을까?

어려운 질문임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북한 체제는 변화하는 인민들의 의식을 상당히 경계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애국운동, 혁명적 대중운동”을 강조한 것도 그러하고 “당조직들과 근로단체조직들”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조직 활동에 나설 것을 주문한 것도 변화하는 인민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안간힘으로 해석 가능하다. 사상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반동사상에 대한 통제와 규율을 강화하는 것은 인민들의 의식에 변화가 있음을 고백하는 증거이기에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인민들이 체제로부터의 ‘해방’에 나설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이르다. 시장화가 진행된 지 상당 기간이 지난 북한은 계획경제와 시장이 공존하는 나름의 경제 체제를 구축하였고 인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의 ‘대책’을 세우며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생적으로 움튼 초기 시장 세력은 국가와의 결탁을 통해서 힘을 키워 갔고 이제는 국가도 이들을 쉽사리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국가의 자원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한 시장 세력에게 국가는 가장 중요한 협력의 대상이다. 서로의 역할과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국가와 시장의 끈끈한 관계는 상당한 생명력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시장에 기대 일상을 꾸려가는 대부분의 인민들이 현 상태의 유지를 안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이다. 게다가 북한 인민들 대부분은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나갈 여유가 없다. 빠듯한 살림살이를 꾸려 생활하는 상황에서 인민들이 집중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일은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 인민들의 삶에서 ‘해방’은 추상적이지만 생존은 생활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닮았지만 다른’ 남·북의 2023년은?

남과 북은 닮았지만 동시에 다르기도 하다. 사회와 단절되어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남한 사람들의 ‘해방’에는 역사 무게와 구조적 모순이 부재한다면, 북한 체제가 내세우는 외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당위는 인민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야 말았다. 역사가 어찌 되었건 경제적 성장만 이뤄낼 수 있다면 ‘해방’될 것이라 여겼던 남한 사람들의 마음은 병들어 버렸고, 역사 청산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북한 인민들은 생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만약 ‘해방’이라는 것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순이 얽혀 있는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남북한의 사람들 모두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해방’이라는 것이 모름지기 스스로 나설 때 시작되는 과정이므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첫걸음은 뗀 것일 테니.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밖에는 기댈 것이 없는 또 다른 한 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꿈꿔야 한다. 새해에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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