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을 빼앗는 인간 향한 역설적 화법…아직도 코끼리가 보고 싶나요?[그림책]
나는 코끼리야
고혜진 글·그림
웅진주니어 | 44쪽 | 1만5000원
누군가 나를 납치했다. 엄마와 느닷없이 생이별을 했다. 납치범은 나를 좁은 방에 가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굶겼다. 날카로운 채찍으로 때렸다. 그가 조련하는 대로 움직이면 그제야 죽지 않을 만큼만 음식을 줬다.
그는 나에게 억지로 울긋불긋한 옷을 입히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웠다. 돈을 내고 나를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낄낄거렸다. 공을 굴리고, 물구나무를 서고, 그림을 그리고, 무거운 짐을 옮겼다. 매 맞지 않기 위해. 오직 살기 위해서.
쇼가 끝나고 다시 좁은 방으로 돌아오면 예전에 살던 고향 생각이 났다. 높은 산을 오르내리며 풀 냄새와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던 시절을. 그곳에서 나는 큰 강, 깊은 숲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진흙탕에서 뒹굴며 마음껏 놀았다. 내키는 대로 먹고, 똥을 아무 데나 싸도 누구도 나를 때리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나’는 코끼리다. 코끼리여서 안도했는가? 만약 위 문장 속 ‘나’가 사람이라면? 명백한 인권 유린이 될 것이다.
그림책 <나는 코끼리야>는 야생 코끼리의 삶을 착취하는 인간을 역설적 화법으로 꼬집는다. 책 속의 코끼리는 초원에서 가족들과 무리 지어 생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며 지칠 땐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독백을 읽다 보면 좁은 우리에 갇혀 학대당하며 늙어가는 동물의 가엾은 현실이 자꾸만 떠오른다. 자연스러운 코끼리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인간의 무자비한 소유욕에 대한 반성을 부른다.
검정, 빨강, 초록 세 가지 색만 이용해 판화기법으로 표현한 그림은 대자연의 생명력과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야생동물의 위태로움을 대조시키며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코끼리를 인격화한 서사는 말 못하는 동물이라는 이유로 쉽게 타자화해버리는 인간의 오만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가 기본권인 것처럼, 동물도 동물답게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웅변한다.
‘동물원이나 서커스장에 가지 않고 실물의 코끼리는 어디에 가서 보냐’는 인간의 항변도 의식한 듯 일침을 가한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라고. 그러면 보일 것이라고. 진짜 ‘코끼리다운’ 코끼리를.
손버들 기자 wi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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