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과 생태·문학 에세이 그리고 시집…장르를 넘나드는 필력[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기자 2023. 1. 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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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마크 헤이머 지음·황유원 옮김
카라칼|288쪽|1만7800원

나는 누군가의 삶을 엿보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누군가의 삶에서 존경할 만한 부분을 얻고 싶어서. 나는 독서를 하면서 존경심이 내 안에 생성되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때로는 문장 그자체로 존경심을 얻을 때도 있고, 때로는 작가의 상상력에 대해 존경심이 솟아나올 때도 있고, 때로는 사유하는 힘 때문에 그렇게 될 때도 있지만, 그럴 때의 존경심은 잠시 나를 고양시키다 거품처럼 사그라든다. 그런 책들은 남에게 별로 권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존경심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내가 아는 단어로 도무지 요약할 수 없는 이상한 책들을 드물게 만날 때가 있다. 마크 헤이머의 <두더지 잡기>가 요 근래 몇 년 동안 읽었던 책들 중에서는 가장 이상한 책이었다.

마크 헤이머는 영국의 시인이다. 열여섯 살에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부랑자로 살았다. 길 위에서, 강가에서 홈리스로 살아갔고 여러 생업을 전전했지만 그가 가장 오래 해온 일은 정원사였다. 정원 일 중에서도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두더지 잡는 일을 했다. <두더지 잡기>는 두더지를 잡아온 그의 경험담이 빼곡하게 수록돼 있다.

나는 두더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눈여겨본 적도 없고, 두더지의 한살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 무지하다는 이야기인 한편 무관심했다는 이야기다. 헤이머의 책을 읽고 난 후, 두더지에 대해서 세세히 알게 되었다 해도 수확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정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두더지를 잡는 법에 대하여 정확하게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도시의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글을 쓰며 살고 있는 나에게는 상관있을 리 없는 정보에 불과하기에,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기억에 가물거리며 남아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헤이머의 두더지 사냥에 관한 문장들을 빠져들며 읽었다. 헤이머가 몸소 겪어 전해주는 이야기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이 책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싶어서 더 흥미진진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옳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두더지 잡기>를 비롯한 헤이머의 행보는 영국의 ‘자연 작가’ 계보에 가깝다. 자연 작가들은 대개 물질문명 중심의 인간의 삶을 성찰하게 하거나 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명의 근본을 다시금 깨우치고 전달한다. 그러나 헤이머는 두더지 사냥꾼이다. 정원 소유주들에게 의뢰를 받고 덫을 놓아 두더지를 잡는다. 이 책에는 헤이머에 의해 살생된 두더지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덫에 걸려 싸늘하게 죽은 두더지들뿐 아니라 죽은 두더지의 가죽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죽을 벗겨본 경험들까지. 그리고 더 이상 두더지를 잡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까지. 정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더지가 자기 정원을 망칠까봐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고용해 두더지를 잡는 일을 하지 않고 보다 인도적인 방식으로 두더지를 처치할 수 있는 노하우를 얻을 수는 있겠다. 거의 그러한 종류의 실용서에 가까울 정도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책일까. 한 명의 독자로서 굳이 초점을 두자면, 살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눈으로는 살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등 뒤로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반추하는, 이상하고도 서늘한 그림자가 커다랗게 드리워진다.

이 책은 에세이로 분류될 수 있지만, 각 장에 헤이머의 시편들이 수록돼 있다. 키워드 분류법으로는 생태 에세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실은 더없는 문학 에세이다. 책표지에는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우아한 부제가 붙어 있다. 우아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우아함은 아니다. 부랑아로 살아온 한 사람에게 가장 적합했을 ‘두더지 사냥꾼’이라는 직업에 대한 고백들로 점철돼 있다. 정원사라고는 하지만 두더지 사냥꾼이라는 독특한 직업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귀천’ 혹은 ‘가난’ 같은 용이한 단어들로 헤이머의 생애를 함부로 가둘 수는 없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시선 자체를 헤이머가 이 책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감이 될 만한 타인의 전기를 다룬 에세이에서 작가는 자주 함정에 빠진다. 자신의 인생 자체를 담보로 쓴 에세이들에서도 이 함정은 피하기 힘들다. 아무리 배제하려 해도 완전히 배제되지 못한 채로 은연중에 배어 있는 것들이 있다. 영웅담의 레퍼토리. 성찰과 참회에 이르는 단순 회로. 수상쩍은 자아도취와 자기연민. 인생을 회고하는 정형성 등등. <두더지 잡기>에서 헤이머의 문장들은 이런 함정들의 사이사이를 오솔길을 걷듯 차분하게 걸어간다. 그리고 그가 자연으로부터 겪어온 것들을 광활하게 펼쳐보인다. 마침내 왜곡 없이 우리가 자연의 본성을 이해하도록. 한 권의 에세이가 결국은 한 권의 시집으로 다가오게끔.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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