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더 글로리' 송혜교, 멜로의 알 깨고 세상으로 나오다

김지혜 2023. 1.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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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상이다"

현남(염혜란)은 동은(송혜교)에게 삶은 달걀을 건네며 고전 문학 속 글귀를 읊는다. 그리곤 딸이 읽은 책 '래미안'이라고 소개한다. 그러자 동은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알은 세상 밖으로 못 나와요. 삶았잖아요. 그리고 그 책은 '래미안'이 아니라 '데미안'이에요"라고 반응한다.

'알을 깨다'라는 말에서 이 배우의 변화를 떠올렸다.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끌며 '로코 퀸', '멜로 퀸'의 수식어를 얻은 배우가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복수극에 도전했다.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송혜교는 이 작품에서 10대 시절 학교 폭력으로 영혼까지 상처받아 복수를 다짐하는 문동은 역할을 맡았다. 멜로 일변도의 작품 활동을 해온 송혜교로서는 도전에 가까운 역할이었던, 이 변신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다.

송혜교의 연기 변신과 더불어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각본과 연출도 흥미롭다. 학폭을 다룬 여느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복수'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내달리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파트1에 해당하는 8부가 공개된 가운데 본격적인 복수를 그려낼 파트2에 대한 기대감도 수직상승했다.

◆ 학폭으로 망가진 인생…송혜교, 복수의 화신이 되다

'더 글로리'는 운전대를 잡은 한 여성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자동차는 달팽이관처럼 꼬인 도로를 지나 '세명'이라 적힌 도시의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그렇게 닿은 곳은 학교다. 누군가에겐 풋풋한 추억이 가득한 낭만의 장소겠지만, 누군가에겐 무시무시한 기억이 켜켜이 새겨진 공포의 공간일 수도 있다.

카메라는 학교 운동장을 비춘 후 그 여성이 발 디딘 한 건물 옥상에 당도한다. 들꽃과 화분으로 에워싸인 옥상의 한가운데에 선 그녀는 마른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건너편 고급 타운 하우스를 응시한다.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서늘한 오프닝이다. 드라마는 2022년 여름에서 2004년 여름으로 시계추를 돌린다. '그녀는 왜?'라는 물음표는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선명한 답변으로 돌아온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복수극이다. 학폭 피해자가 긴 시간을 준비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가해자를 찾아가 되갚아주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뤄진 적 있는 소재지만 '더 글로리'는 대중 작가 김은숙의 필력과 인기 스타 송혜교의 연기를 통해 '학폭'이라는 화두를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담론으로 끌어올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송혜교의 연기다. 밝고 명랑하거나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은 온 데 간데없다. 푸석푸석한 피부, 창백한 낯빛, 꽉 다문 입술에서부터 피해자의 상처가 읽히는 듯하다. 동은은 삶의 에너지를 복수를 향한 집념으로 교환했다. '눈눈이이'를 실행에 옮기는 움직임은 시종일관 차갑고 서늘하다.

송혜교의 본 적 없는 얼굴이며 연기였다. 물론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0년 미국 독립영화 '페티쉬'에서 팜므파탈에 가까운 캐릭터를 소화한 바 있다. 그때의 연기는 미숙했다.

무려 10여 년이 흘러 제대로 감행한 변신에서는 그간 쌓아온 연륜과 내공이 느껴졌다. 어쩌면 많은 감독과 작가들이 송혜교라는 배우를 애써 멜로의 틀에 가뒀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간 한 번도 안썼던 표정과 감정 분출 방식을 통해 연기 자체로 재밌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때때로 목소리와 함께 특유의 연기톤에 대한 지적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 글로리'에서의 송혜교는 자신의 음성과 연기 '쪼'(연기에 있어 개인이 가진 습관)를 문동은의 총알처럼 활용한다. 특히 "용서는 없어. 그래서 영광도 없겠지만", "타락할 나를 위해. 그리고 추락할 너를 위해" 등 김은숙 작가 특유의 대구법(對句法)이 돋보이는 대사는 송혜교의 건조한 중저음과 어우러지며 대사 자체의 기름기를 덜어내는 효과까지 냈다.

극 내내 흐르는 내레이션도 인상적이었다. 송혜교는 그간의 작품에서 내레이션을 읊은 경험이 꽤 있다. '더 글로리'에서의 내레이션은 언뜻 들으면 절친한 친구 혹은 오랜 연인에게 보내는 연서와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동은이 연진(임지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는 '그리운 연진에게'라는 말로 시작해 문장 말미마다 "연진아~"라는 호명으로 마무리된다. 상냥한 듯 서늘한 내레이션의 톤 앤 매너는 서슬 퍼런 영상과 어우러지며 폭력으로 얼룩진 청춘에 관한 한 맺힌 회고임을 알게 된다. 나아가 앞으로 펼쳐질 핏빛 복수극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송혜교는 동은 캐릭터를 만들어가며 "위로가 많이 필요한 인물인 만큼 오히려 불쌍하게 연기하지 말자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다. 인물보다는 복수가 부각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또한 복수를 향해 직진하는 동은의 뚜렷한 목적성을 표현하기 위해 내레이션 대사 톤과 속도감도 일정하게 다듬어가며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덧붙였다. 제대로 된 분석이었고, 실행이었다.

최근 몇 작품에서 송혜교가 연기한 인생과 캐릭터는 판타지에 가까웠다. 물론 어떤 드라마는 꿈을 팔고, 판타지를 양산한다. 그게 대중이 드라마를 소비하는 이유 중 하나라 할지라도 대중은 배우에게는 끊임없이 다양함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송혜교의 최근 5년은 제자리걸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더 글로리' 안에 펼쳐진 지옥도, 특히 어린 동은이 맞닥뜨렸던 학교 폭력은 형태와 크기는 다를지라도 지금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풍경임에 틀림없다. 송혜교의 얼굴로 동화 속 세상이 아닌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의미 있는 시도였다.

배우의 얼굴이 아름다움 그 자체로 칭송받을 때가 있다면, 작품 속 삶과 인물을 투영하며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산할 때가 있다. 대중이 애정하는 배우에게서 오래도록 보고 싶은 아름다움은 후자다. 송혜교가 '더 글로리'로 보여준 변화가 반가운 이유다.

◆ 학폭에 대한 경종vs사적 복수의 극단성, 깊어질 파트2의 고민

"이 작품인 19금인 이유는 욕설과 학폭이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법 체계 안에서의 복수가 아니라 사적 복수를 선택하는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저와 감독님은 사적 복수를 옹호하지 않은 입장이기도 하고, 동은이 가진 철학은 19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성인들이 봤으면 합니다"

'더 글로리'는 10대의 학교 폭력을 방아쇠로 활용하는 복수극이지만 10대들은 볼 수 없는 관람 등급을 받았다. 드라마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가 19금 관람가여야 했던 당위로 '사적 복수'를 꼽았다.

이 작품은 여느 학폭 소재의 작품과 달리 가해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1,2회에 집중된 10대 동은의 학폭 피해 묘사는 폭력의 수준을 넘어서 고문에 가깝다.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폭력 수위는 뒤이어 펼쳐질 동은의 사적 복수에 강력한 당위성을 부여한다.

김은숙은 종전 작품처럼 판타지를 지렛대 삼아 서사를 경제적으로 펼쳐낸다. 복수를 위해 20대를 온전히 바쳤다고는 하지만 혈혈단신인 흙수저 동은이 부와 권력, 명예까지 갖춘 가해자들을 농락하는 과정은 너무 쉽다. 동은이 놓은 덫에 타겟들은 너무도 순진하게 걸려든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동은과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현남(염혜란)의 연대도 지극히 드라마적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현남이 일당백의 조력자 역할을 해내는 것도 현실성을 따진다면 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이 관계 설정이 의미하는 바를 시청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두 배우가 만들어낸 신들은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소 허술한 설정과 전개가 수용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시의성 있는 주제와 메시지를 바탕으로 펼쳐내는 사회 드라마라는데 시청자들이 어느 정도 동의하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는 아닐지라도 대다수의 시청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드라마적 허용이라 할 수 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내공 있는 연출, 각본이 어우러진 '더 글로리'는 파트1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파트1이 핏빛 복수를 위한 빌드업이었다면, 파트2에서는 피해자의 서늘한 복수극이 제대로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파트2를 준비하고 있는 제작진의 고민은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피해자가 사법 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삶이 망가졌다고 해서 법 테두리 밖의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발생한다. 선과 악, 양심과 도덕, 가해와 피해가 전복되면서 벌어지는 파국을 이 드라마가 어떻게 수습할지도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문동은은 이미 사적 복수의 끝은 파멸이 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암시했다. 그래서 이 복수는 끝까지 차가워야만 한다. 그녀의 결의에 찬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용서는 없어. 그래서 영광도 없겠지만"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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