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글맛' 느끼려면 느리게 읽기로 뇌 단련해야
문해력 저하는 사회적 화두가 된 지 오래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문해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코로나19 시대는 이를 가속했다. '읽기'의 영역은 그저 종이책에만 그치지 않는다. 21세기의 독서는 스크린, 전자책, 오디오북까지 아우르며 오감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나오미 배런 아메리칸대 언어학 명예교수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PC와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술이 우리 언어와 사회적 상호작용에 끼친 영향을 연구해온 언어학자다. 수전 그린필드의 '마인드 체인지',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 등은 일관되게 온라인 읽기가 종이 읽기 능력을 저하한다고 경고해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학습용 읽기' 혹은 '자세히 읽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뇌 연구를 집대성해 21세기에 필요한 독서법을 제안한다.
학계의 '읽는 뇌(reading brain)'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읽기란 '문화적 발명'이며, 따라서 모든 새로운 독자는 성장 과정 내내 가소(可塑)적 상태에 있는 새로운 회로를 자신의 뇌에 구축해야 한다. 모든 독자의 읽기 회로는 시각, 언어 기반, 인지, 정동(情動) 과정을 담당하는 뉴런의 네트워크 사이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연결을 토대로 삼는다. 읽기 회로는 사람의 교육과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인다.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복잡한 지적 기술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읽는 뇌였기 때문이다. '깊이 읽기' 과정을 통해 가장 중요한 사유의 과정인 유추와 추론, 공감, 비판, 분석에 다다르게 됐다. 읽는 기술의 고도화에는 숙련의 시간이 필요한데, 현대인은 여기서 암초를 만났다. 디지털 매체는 속도가 빠르고 멀티 태스킹이 자유로워 대량의 정보를 처리하는 데 적합하지만, 느리고 시간이 필요한 인지와 성찰에는 우리의 주의력과 시간이 할당되지 못한다.
문학 연구자 스벤 버커츠는 깊이 읽기에 대해 "천천히 생각에 잠기며 한 권의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저 단어를 읽는 게 아니다. 그 주변에서 우리의 삶을 꿈꾸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이 정보를 훑어보는 '하이퍼 읽기'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텍스트가 혼용된 세상에 사는 현대인에게는 문해력의 개념이 변하고 있다. 읽기 문화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여가를 위해 독서를 하는 미국 인구 비율은 2004년 28%에서 2018년 19%로, 시간은 하루 23분에서 16분으로 크게 줄었다.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질문은 종이 읽기와 디지털 읽기의 효용에 관한 논란이다. 시대적으로 이제 디지털이냐 종이냐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둘 다 공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실험에 따르면 같은 분량도 손으로 넘기며 종이로 읽을 때가 스크롤로 디지털 읽기를 할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종이책을 주의 깊게 읽으라는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서다. 연구에 참여한 학부생은 "더 주의 깊게 읽기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답했다.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독서법으로 '하이브리드 읽기'를 제안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소설 등 서사가 있는 글을 읽고 인물과 사건을 파악하는 질문에서 종이로 읽을 때가 디지털로 읽을 때보다 더 기억을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이의 물성이 기억에 도움을 준 것이다. 반면 대만에서 5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디지털 도구를 사용했을 때 명시적 독해는 물론 추론적 독해도 좋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물리학자 에릭 자무르와 연구진이 설계하고 하버드대에서 개발한 퍼루즈올이란 시스템처럼 능동적 학습을 촉진하는 읽기 학습 기술도 존재한다. 종이책만이 기억의 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깊이 읽기를 위해선 '양손잡이 뇌'가 구축될 필요성이 있다. 취학 전 아동의 경우 읽기 목적이 소통력 향상이라면 종이책을, 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목적이라면 멀티미디어 전자책을 활용하는 것이 낫다. 구체적으로 심지어 디지털 매체를 읽을 때도 스크롤보다 고정된 페이지를 읽을 때 집중도가 높아진다는 조언을 건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도다. 디지털 자료를 읽을 때는 의식적으로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해야 읽는 뇌를 단련할 수 있다. 읽는 인간에게 필요한 건 균형이다.
매체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매체의 변화 속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종이책과 종이책 읽기는 죽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디지털 읽기의 영역이 커지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저자는 악마처럼 비난받던 디지털 읽기를 교육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도구라며 품에 끌어안는다. 오히려 기술의 발달은 풍요로운 읽기의 시대를 불러왔음을 증언한다.
교육 종사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읽기 학습의 사례와 연구 결과가 망라된 책이다. 읽기에 관한 이 책의 읽기는 쉽게 속도가 붙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랫폼의 홍수 속에서 읽기 문화라는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려는 저자의 분투가 느껴진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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