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마른 몸으로 살았다’···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난 적 없던 여성 이야기[책과 삶]
20대에 첫사랑에게 성폭력 당하고
결혼 뒤 ‘아이 낳기 위한 몸’ 취급
평생 타인의 평가서 못 벗어나고
성적 대상화 시달리는 여성들
모녀의 고백으로 젠더 문제 고발
몸과 여자들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140쪽 | 1만3000원
“저의 몸과 저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어서 저는 단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들어주세요.”
소설 첫 문장이다. 1983년생 ‘나’는 어린 시절 겪은 일부터 이야기한다. 나는 “평생에 걸쳐 마른 몸”으로 살았다. 타인 평가에서 벗어났던 적이 없다. 어머니 친구들이 말했다. “얘는 왜 이렇게 말랐어? 뼈밖에 없네.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어.”
이런 결론을 내렸다. ‘불쌍할 정도로 말라빠진 몸.’ 민주와 친하게 지냈다. 민주는 반에서 가장 뚱뚱했다. 반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 공통점 덕에 친해졌다. ‘우리의 정체성’을 잊을 정도로 신나게 놀았다. “민주는 제 몸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저도 민주의 몸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말고도 우리에겐 말할 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민주는 남자아이들이 돌린 쪽지 속에서 잔인하게 유린당한다. “김민주의 뚱뚱한 XX는 너나 가져. 나는 더럽고 냄새나서 싫다.” 담임이 쪽지를 발견하곤 아이들에게 읽어줬다. 담임은 내 이름이 나온 대목에서, 내 간절한 눈빛을 보곤 읽기를 멈췄다. 이 일 이후 민주와 놀지 않았다. 열 살 때였다.
이듬해 초경 때문에 고민한다. “멘스를 하지 않는 저의 몸을 경멸할 것 같았습니다.” 이차성징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가슴이 커지지 않으면 어쩌나. 그래도 누가 나를 좋아해줄까. 결혼은 할 수 있나.”
20대로 접어들고도 말라빠진 상태였다. 연애는 시작했다. ‘첫사랑’이다. 신체 접촉을 하려던 남자에게 과민하게 반응했다. “이유가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머릿속을 뒤져볼 것도 없이 성추행을 당했던 기억이 주르륵 떠올랐습니다.” 남자는 집요해졌다. 섹스를 거부한다고 매일 화를 냈다.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나는 어느 날 남자 힘에 떠밀려 모텔로 갔다.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기만 했다. “그와 섹스를 한 게 아니라 그가 저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깨달았다. “상흔처럼 틀어박힌 기억이 제 몸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울면서 몸을 씻고 나왔더니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스무 살 때다. 훗날 ‘강간’이라는 걸 알았다.
“몸을 그대로 두고 싶고, 몸을 섹스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가슴일 뿐이고, 제 몸일 뿐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욕망 되고 싶지 않은 저의 몸일 뿐이었습니다.” 내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혼하곤 남편 요구로 원하지 않은 섹스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하며 살았다. 결국 콘돔을 사용했지만, 남편은 부작용이 많은 피임약을 선호했다. 결혼한 지 반년이 지난 때 “언제쯤 아이를 가질 계획이냐”는 말을 시부모에게 들었다. 몸을 또다시 강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를 낳는 일에도 제 몸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갖는 일은 온전히 저의 선택과 열망으로 결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날 집으로 들어온 남편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콘돔을 꺼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내 몸은 인격이 있어. 내 몸은 존중받아야 해. 내 몸은 나조차 함부로 할 수 없어.” 어머니에게 이혼 각오를 말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이혼한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인간이 아니라 몸으로 보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다음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이혼했다. “엄마, 나는 내 몸이 아니라 그냥 나야. 나는 내 몸으로 말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행하는 것으로 말해지는 존재야.”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2부는 1959년생 어머니 ‘미복’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미복은 고향 한 남자를 떠올린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겁탈하려는 ‘범죄자’였다. 아무도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냥꾼’이라 불렀다. 겁탈을 “본능에 충실한 남자의 성 충동으로 해석”하는 시대였다. 산골 마을엔 파출소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신고도 못한 채 도망쳤다. 범죄자는 더 기세등등했다.
엽총 한 자루도 가졌다. 미복 부모는 딸들이 범죄를 당할까 봐 다른 마을로 이사한다. 다른 범죄를 피하진 못했다. 하얀 피부와 예쁜 얼굴에 성인 같은 몸매를 지닌 미복은 초등학교 때 담임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공부를 잘하고도 “여자는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는 아버지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방 귀신’이 되어 지내다 몸 마비 증세가 왔다. 약을 먹고 회복한 뒤 가출해 서울로 간다. 중개인에게 속아 요릿집에 팔려간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다. 이곳 ‘자매들’의 몸은 “저임금 노동을 하는 몸” “술 시중드는 몸” “남자들의 집요한 시선을 받는 몸” “끔찍한 일을 참아내야 하는 몸” “고향에 돈을 보내야 하는 몸” “사회와 가족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몸”이었다. “결혼이 유일한 탈출구임에 절망”하면서도 결혼한 뒤 아이들을 낳고 살아간다. 이혼하겠다는 딸 아이에게 악담을 퍼붓고 후회는 했지만 “딸들을 역할을 수행해야 할 몸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잔혹한 사회를 혼자 헤쳐나가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딸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
3부는 마흔을 앞둔 ‘나’가 현재를 말한다. ‘여성 몸’을 두고 벌어지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인용품점엔 이런 안내 문구가 붙었다. “(여성) 판매 직원에 대한 모든 성희롱을 금지합니다. 특히 사용법을 묻는 질문으로 빙자한 성희롱을 금지합니다. 판매 직원의 성 경험에 대해 묻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 밖의 모든 신체적 접촉을 무조건 금지합니다.”
새로 구한 직장에서 노골적으로 음담패설, 성차별 발언을 늘어놓는 직장 상사에게 시달린다. 마른 몸은 여전히 시빗거리다. “고기 좀 많이 먹어라, 여자가 그렇게 말라서 어떻게 아이를 갖겠느냐.” 여성들만 일하던 전 직장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누구도 학습된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직원’일 뿐이었지, 누구도 ‘여성 직원’이지는 않았습니다.” ‘여성과 몸’을 다루는 고백 형식의 소설에서 작가 이서수는 ‘나’의 입을 빌려 젠더 억압을 말한다. 우선 여성의 몸에 냉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에 대해서다. 그 사회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내놓는다. 사회엔 “올바른 하나의 몸”과 “올바르지 못한 그 밖의 여러 가지 몸”이 있을 뿐이다. 사회는 차이로 차별한다.
이서수는 작가의 말에서 보부아르의 “섹슈얼리티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는 말도 인용했다. 그는 “전해야 할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다는 믿음을 품고” 쓴 소설이라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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