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5일 방송된 '安(안)의 전쟁–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일우, 가수 넉살, 위키미키 최유정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청년
때는 1909년 10월 26일 이른 새벽, 만주 작은 시골에 있는 채가구역. 역사 안에 한 남자가 있어. 남자의 이름은 우덕순, 30세로 기묘년생 토끼띠야. 이 남자는 품 속에 권총을 숨기고, 한 남자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어. 잠시 후면 그 남자가 탄 열차가 올 채가구역에 올 예정이야. 밖에는 러시아 군인들이 쫙 깔려있어. 당시 만주지역의 철도는 러시아가 관할하고 있었어.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돼 덕순이 역사 밖으로 나가려는데, 바깥에서 문을 잠궜어. 문 좀 열어달라 소리쳤지만 군인들은 들은 척도 안해. 오전 6시, 어둠을 뚫고 열차가 달려와. 하지만 우덕순은 열차가 지나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어.
3시간 후, 이번엔 하얼빈역이야. 여기에도 역시 러시아군들이 쫙 깔려있어. 곧 도착할 열차 안에 엄청 높은 사람이 타고 있거든. 공작의 작위를 받은 외국의 고관이야. 러시아 입장에선 굉장히 중요한 손님이지.
하얼빈역 역사 2층에 있는 찻집. 한 남자가 혼자 차를 마시며 승강장을 내려다보고 있어. 사냥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은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 뭔가를 숨기고 있어. 벨기에산 브라우닝 자동 권총. 탄창에는 7발이 장전돼 있어. 이 남자의 이름은 안응칠, 역시 30살 기묘년생 토끼띠야.
응칠은 어제 덕순과 헤어지며 그런 이야기를 나눴어. "그대가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시키겠네"라고. 응칠의 목표 역시 열차에 탄 그 공작이야.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곳에서 이 공작을 죽이기 위해 기다린거야.
오전 9시 하얼빈역. 드디어 열차가 들어서고 러시아 재무대신이 열차에 올랐어. 열차 안에서 회담을 하기로 했거든. 30분 후 드디어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 검은 양복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신사야. 곧바로 그를 환영하는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이 시작됐어. 경례를 받으며 공작이 걸어가던 그 순간. 의장대 사이로 누가 번개같이 튀어나와. 사냥 모자를 쓴 안응칠이야. 손에 권총을 들고 있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어. 그리고 공작은 그 자리 쓰러졌어.
외국 고관을 사살한 30세의 안응칠.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 '도마 안중근' 의사야. 안응칠은 안중근 의사가 어린시절 집안에서 불리던 아명이야.
그날의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어. 사건 당일 미국 신문 1면에 톱기사로 보도됐어. "일본의 이토 공, 암살되다"라고. '이토 공', 바로 이토 히로부미야.
일본에서 일왕 다음으로 높은 사람은 총리야. 지금은 기시다 후미오지. 일본의 초대 총리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어. 일본 제국헌법의 초안을 쓴 사람도 이토고, 총리를 4번이나 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 그래서 일본에서는 위대한 정치인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으로 불렸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무명의 조선 청년한테 피살된 거야.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열강들의 관심이 이 청년에게 쏠렸어. 그는 누구고, 왜 이토를 쐈는지.
하얼빈 이론 총영사관에서 조사가 시작됐어. 일본 검사와 안중근이 마주 앉았어. 검사가 "이토 공작을 왜 원수로 여기는가?"라고 묻자 안중근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어.
"그 자를 원수처럼 여기게 된 이유는 많다. 첫째,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째,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중략)… 이상의 죄목에 따라 이토를 살해하였다."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 15가지 의거의 명분을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어.
근데 사실, 아ㄴ중근은 처음부터 이토를 죽이려고 한 게 아냐. 그 사연은 4년 전부터 시작됐어.
▲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1905년 11월 17일, 경성 한복판 덕수궁이야.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이 궁을 포위하고, 남산 위에 있는 대포가 덕수궁을 조준하고 있었어.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한국과 5가지 조약을 체결해. '한국이 약하니까 일본이 보호하겠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조약이야.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거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거야. 을사년에 있었던 이 조약,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이야.
을사늑약 체결 직후에 일본인들이 찍은 기념사진이야. 정 가운데 편하게 앉아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야. 을사늑약을 주도한 이토는 통감부를 만들고 초대 조선 통감이 돼. 이제 우리나라의 내정에도 간섭하겠다는 거야.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분개한 청년이 있어. 당시 26세의 안중근이었어. 당시 상황에 대해 안중근 의사가 직접 쓴 글이 있어.
"1905년 12월, 상해로부터 진남포로 돌아와 본 즉, 아버지께서 중도에 병세가 위중해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애통함을 가눌 길이 없어 대성통곡하며 몇 번이나 쓰러졌다. 다음날 청계동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가족들과 함께 그 해 겨울을 보냈다. 그때 나는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조국이 독립하는 날까지로 기한을 정했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태훈 진사는 을사늑약 직후 돌아가셨어. 망국의 설움에 병세가 깊어진 거야. 중근을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아 중국을 떠돌다가,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어. 나라와 아버지, 가장 소중한 두가지를 한꺼번에 잃은 거야. 중근은 맹세를 했어. 조국이 독립하기 전까진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맞서기 위해 가장 먼저 뭘 했을까? 중근은 가장 먼저, 남은 재산을 정리해 학교를 지었어. 1906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했어. 일본에 맞서려면 인재를 길러야 한다 생각한 거야. 그런데 상황은 급격히 나빠져. 1907년 7월에는 일본이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8월에는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어.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어.
전국 각지에서 민초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어.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 맞선 거야. 당시 일본군은, 청나라, 러시아, 세계 열강의 군대를 다 박살냈어. 그런데 우리 의병은, 무기도 제대로 없이 싸웠어. 수만명의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돼. 그런데도 의병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
우리한텐 외교권이 없잖아. 일본은 다른 나라에 '우리가 한국을 보호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도 그걸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선전해. 이런 상황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일본의 침략은 정당화 되는 거야. 그래서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거야. 항변을 할 수 있는 게, 의병 투쟁 밖에 없어.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그게 승산이 없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싸워야 했던 이유야.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도 결심해. 교육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고, 일본과 직접 싸울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1908년 6월, 두만강 인근 지역에 300여명의 남자들이 모여있어. 다들 총, 칼을 들고 있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이들의 정체는, '대한의군'이야. 의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야. 의병들을 이끌고 있는 남자, 안중근이야. 그동안 북간도와 러시아를 다니며 사람들을 모았어. 그렇게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참모 중장으로 선임됐어.
안중근과 300명의 의병들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에서 일본군과 첫 전투를 했는데 이겼어. 연이어 일본군을 격파하며 더 깊이 치고 들어갔어.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일본군 포로들을 잡았는데, 따로 수용할 곳이 없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까. 일본군은 사로잡은 의병을 잔인하게 죽였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며, 일본군 포로들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어. 그런데 안중근은 포로들을 풀어줬어. 기껏 잡아놓고 왜 풀어주냐고 반발하는 의병들에게 안중근은 단호하게 "적들이 나쁜 짓을 한다고 우리마저 야만적인 행동을 해서 되겠는가? 4천만 일본인을 다 죽인 뒤에야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인가?"라고 말했어.
안중근은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어. 명령을 따른 것 뿐이지, 명령을 내린 자가 진짜 적이라 생각한 거야.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들을 풀어준 것이다"라고 동료들을 설득했어. 만국공법, 요즘 말로는 '국제법'이야. 안중근은 전쟁을 하려면 국제법을 지키면서 해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이 전쟁은 의롭고 정당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 열강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그래서 포로들을 살려 보낸 거야.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서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돼. 며칠 후 장맛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 일본군이 공격을 했어. 위치가 탄로난 거야. 일본 병력은 어림 잡아도 5천여명. 사방이 다 일본군이야. 3백명 대 5천명, 싸움이 되겠어? 다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어.
▲ 피로 맹세한 조선 독립
8개월 후, 러시아 연추 지역. 안중근은 한 허름한 집에 앉아있어. 그 옆으로, 11명의 남자들이 있어. 다들 굉장히 비장한 표정이야. 중근이 입을 열었어.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필코 목적을 달성해야 하오'라고. 이들이 말하는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야. 중근은 이제 의병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의 싸움을 결심한 거야.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이들은 "우리의 손가락을 끊어서 맹세를 하자"고 결의해. 단지(斷指)를 거부한 사람은 없었어. 12명 모두 칼을 꺼내서 차례대로 왼손 무명지의 첫 마디를 잘랐어. 그리고 그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 적었어.
이 태극기를 들고 다같이 외쳐. "대한독립 만세!"라고. 의열 항쟁을 시작한 거야.
중근의 최우선 목표는 이토 히로부미야. '나라를 빼앗은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내 손으로 반드시 처단하겠다'고 다짐했어. 당시 중근의 나이 서른살이었어.
조선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간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을 맡아 일왕을 보필하고 있었어. 그에게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해. 그런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는 걸까. 1909년 10월 1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달 말에 하얼빈에서 러시아 고관들과 회견을 한다는 소식을 접해.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어.
거사를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동지가 필요해. 다음날 중근은 한 남자를 만났어. 그게 바로 우덕순이야. 1년 전에 만나서 친해졌는데, 말수가 적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야. 중근은 덕순에게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고 하네. 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야"라고 말했어. 그리고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대. 그런데 잠시 후 덕순이 입을 열어. "자네가 한다면, 나도 함께 하겠네"라고.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서로 마음이 통했어.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하얼빈행 기차에 올랐어. 일본에서 건너온 이토는 대련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오는 중이야. 중근과 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고 있어. 3일 후 두 사람은 이토보다 먼저 하얼빈에 도착해. 도착하자마자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먼저, 새 옷을 사 입고 깔끔하게 이발을 했어. 그리고 사진관으로 향했어.
원래 독립운동가들은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어. 얼굴이 드러나면 안되니까. 하지만 목숨을 건 거사를 앞두고는 사진을 찍었대. 나의 마지막 모습을 꼭 기억해달라는 의미로. 당시 찍은 사진이야.
왼쪽이 안중근, 가운데가 우덕순. 그리고 오른쪽은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함께 온 18살 유동하라는 청년이야. 거사를 앞둔 이들의 결연한 표정에서 무게감이 보여. 그날 밤, 중근은 잠을 못 이루고 한 편의 시를 적어.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 구나. 분개하며 한번 떠남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 도적 이토여. 어찌 목숨을 누리려 하느냐.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 中
▲ 거사에 성공한 안중근
다시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이토가 탄 열차가 진입하고 있어. 역사 2층 찻집에 앉아있던 중근은, 하얼빈역에 기차가 왔다는 건 덕순의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의미했어. 이제 중근의 차례야. 회담을 마친 이토가 열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중근은 곧바로 승강장으로 향했어. 탈출 경로? 생각조차 안 했어. 이토만 처단하면 끝이니까.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라. 신문에 기재된 작은 사진, 아주 흐릿한 흑백사진만 봤었으니까. 그냥 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두 줄로 늘어선 러시아 의장대 앞으로,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지나가. 그 중 맨 앞에 있는 노신사가 눈에 들어와. 길게 늘어뜨린 흰수염. 안중근은 그 자가 이토일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권총을 들고 앞으로 뛰어가 노신사의 상반신을 조준했어. 열발자국 거리 앞에 다다른 그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어. 연달아 세 발을 발사해. 명중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어. 순식간에 러시아 군인들이 덮쳐서 그대로 쓰러졌어. 그렇게 붙들린 상태로 중근은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어. "코레아 우라!(Korea ura)"라고. '대한국 만세'라고 외친 거야.
안중근이 저격한 노신사는 이토가 맞았어. 중근은 세 발을 모두 이토 히로부미에 명중시켰어. 두 발은 오른팔을 관통해 몸통을 파고들었고, 나머지 한발은 옷 소매를 뚫고 배에 박혔어. 이토는 급히 열차로 옮겨졌지만, 곧 숨을 거뒀어.
그날의 상황을 담은 영상이 있어. 당시 환영식을 촬영하던 카메라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고스란히 담겼대. 그런데 열차가 도착하기 전과, 의거 직후 연행이 되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만이 영상에 남았어.
왜 총격 장면은 없을까?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사실 의거 그 순간도 촬영은 됐대. 근데 당시 일본에 의해 삭제된 걸로 추정되고 있어. 대신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직후에 찍은 사진이 있어.
러시아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일본 측에 넘겨져. 다시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조사실. 의거 직후 잡힌 중근은 이토의 사망 여부를 모르고 있어. 검사에게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중근은, 오히려 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대. "한국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죽었는가?"라고.
의거 소식은 곧바로 경성에도 전해졌어. 이 소식을 접한 한국 국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날 우국지사 황현은 이런 글을 남겼어.
"이토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동서양에 전신이 보내져 만국이 놀라며 조선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들 하였다. 이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감히 소리 내어 통쾌하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만인의 어깨가 들썩하였으며 저마다 깊은 방에서 술을 따라 마시며 서로 축하를 하였다."
▲ 안중근의 꺾이지 않는 결의
며칠 후,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으로 이송돼. 여기서 재판을 받는대. 일본이 여순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넘겨 받았어. 그러니 여순은 일본땅이나 다름 없어 일본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곳이야.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신문에 공개했어.
쇠사슬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야. 그리고 그 밑에 '이토공 암살자 안중근'이라 적었어. 이 사진을 공개한 의도는 흉악한 살인범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 거야.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 사진관을 운영하는 일본인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 거야. 이 엽서는 불티나게 팔렸어.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연예인 굿즈 같은 거야. 왜 이 엽서가 인기가 많았을까. 사진 속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눈빛과 비장한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본은 엽서 판매를 중지시켰어. 일본의 영웅을 죽인 조선 청년이, 조선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어. 일본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지. 이제 일본은 영웅이 된 안중근을 다시 끌어내리려 했어.
일본 검사는 안중근 의사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사심없이 한국 보호 임무를 수행한 이토의 선의를 오해한 살인자로 몰고가려 했어. 가만히 있을 안중근 의사가 아니지. "이토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도적을 경계하러 온 자가, 도리어 도적질을 하는 것과 같다"며 지지 않고 반박했어.
검사가 다른 방법을 시도해. 안중근 의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어. 세례명이 '토마스'. 그걸 한자로 음역해서 '도마' 안중근이라 했어. 일본 검사는 천주교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죄악이 아니냐며, 신앙심을 공격해 굴복시키려 했어. 중근은 여기에도 꺽이지 않았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악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빼앗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것 역시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이다"
검사는 마지막 수단을 꺼내 들었어. 안중근 의사의 아내 김아려 여사와 첫째 아들 우생, 둘째 아들 준생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첫 신문에서 처자식이 없다고 밝혔던 안중근. 독립을 위해 외지를 떠돌던 안중근은 첫째가 태어나는 것도 못 봤어. 심지어 둘째는 이 사진으로 처음 얼굴을 본 거였어. 가족을 이용한 협박. 안중근은 대답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느낀다"라고.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진짜 목적
1910년 2월 7일. 첫번째 공판이 열려.
이 재판의 목적은 분명해. 첫째, 안중근을 파렴치한 살인범으로 만든다, 둘째, 이를 빌미로 삼아 조선을 완전히 집어삼킬 기회로 만든다는 것. 하지만 안중근 의사도 역시 계획이 있었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었어요. 다른 목적이 있었죠."
-신운용 박사, 안중근평화연구원
안중근 의사의 계획은 이거야. '이토를 제거하면 만국 열강의 관심이 쏠릴 것이다. 이를 기회로 일본의 침략 사실과 한국이 처한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릴 것이다'라는 것. 이번 재판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이었던 거야. 안중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안중근 의사의 생각대로 됐어. 이 재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이 연일 기사를 내고 각국의 기자들이 재판을 보러 직접 왔어. 안 의사가 바랐던, 전장이 마련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영국, 러시아, 한국의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호를 맡겠다고 줄을 서. 일본이 그냥 놔둘리가 없지? 절대 불가해. 결국 재판장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 통역관, 속기사까지, 전부 일본 사람이야.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안의사 혼자 일본과 맞서야 해. 방청석에 있던 영국인 기자 찰스 모리머는 공판 첫날의 소감을 이렇게 적었어.
"이토 공의 살인자가 재판에 오르게 됐을 때, 일본인들을 마치 한 줄기 빛 속에 서게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악명 높은 암살사건 그 이상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시범 사례였다. 그리고 이번 재판에는 살인자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 문명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다."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재판이야. 일본 입장에선, 문명국가다운 훌륭한 재판을 보여줘야 해. 그런데, 안의사가 호락호락 했겠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어. 안의사는 일본 형법에 따라 살인죄로 재판정에 섰어. 신문이 시작됐고, 판사의 질문에 안의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
"러일전쟁 개전 당시 일왕은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호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토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의 국권을 침탈했다. 이는 동양의 평화를 해치고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토를 쏘아 죽인 것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안의사의 혀는 칼보다 매섭고 총보다 단호했어. 신문이 이어질수록 재판장이 오히려 당황해 하는 기색이야. 결국 재판 중에 방청객을 내보내는 소동이 벌어져. 그 후에 재판은 빛이 속도로 진행됐어. 매일같이 공판을 열며 엄청 서둘러. 재판시작 6일만에 벌써 5차 공판이야. 그리고 선고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공판이었어.
최후의 진술을 하라는 말에 안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섰어. 꼿꼿이 선채 재판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어. "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진술이 시작됐어. "검사나 변호사 모두 내가 이토의 방침을 오해하고 있다고 한다. 오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토의 방침을 꿰뚫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의 죄악을 하나하나 낱낱이 짚어가며 다 말을 했어. 최후 진술은 무려 한시간 동안이나 계속 됐어.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어.
"이토를 죽인 건 자객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행한 일이다. 전쟁에 나아가 포로가 되어 여기에 서게 된 것이니. 나는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
이토를 제거한 건 군인으로서 전쟁의 정당한 행위를 했다는 거야. 안의사는 일본군 포로를 풀어줄 때도, 이토를 처단할 때도, 최후 진술을 하는 지금도.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이틀 후 2월 14일. 우리가 발렌타인 데이로 기억하는 그날.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져. 만약에 만국공법이 적용됐다면, 전쟁 포로이기 때문에 사형을 내릴 수가 없어. 인도적으로 대하고 전쟁이 끝나면 풀어줘야 해. 일본은 이걸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어.
사형 판결이 내려진 후, 안 의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순간을 목격한 영국인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어.
"안 씨는 예상대로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 오직 안 씨만이 기쁨을 내보였다. 그는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삶이라는 습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이었다. 영웅의 왕관은 거의 그의 손에 들어왔으며 그는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이 악명 높은 사건이 결과적으로 안 씨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 조국 독립을 넘어 평화를 꿈꿨던 사람
선고가 내려진 후, 일본 사람들이 안 의사를 줄지어 찾아오기 시작했어. 다들 손에 종이나 비단 같은걸 들고 와서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어. 안의사를 기념하고 싶다며. 감방 책임자, 변호사들, 심지어 검사, 재판했던 사람들까지. 다들 안의사의 의연함과 인품에 감동한 거야. 그때 적은 안의사의 글귀들. 글씨에서 느껴지는 힘과 기개가 대단해. 안의사가 나긴 유묵은 200점 이상으로 추정되고, 그 중 26점이 대한민국에 반환 혹은 인도되어 보물로 지정됐어.
국가안위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
견리사의견위수명(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과 같다)
안의사가 옥중에 있을 때 그의 동생 정근과 공근이 찾아왔어. 형을 만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했어. 그때 안의사 역시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어서 얼굴이 상기됐다고 해.
간신히 진정한 동생들이 뭔가를 건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였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지 않으니. 오늘 이후로 너는 신묘하게 형장에 나아가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내세에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거라."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야. 아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어머니, 어떤 심정이었을까. 안의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전달해 달라고 했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최후를 받아들이 테니 어머니는 안심하옵소서."
그리고, 사형 집행 직전에 동생들에게 유언을 남겼어.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안의사는 검은 마차를 타고 사형장으로 향해. 그날은 봄비가 내렸다고 해.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찍은 마지막 모습이야. 그가 입은 옷은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수의야.
안의사는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유묵을 남겼다고 해.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는 의미야. 마지막 순간까지도 군인으로서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한 거야.
이토가 사망한지 150일 후, 공교롭게도 이토가 사망한 날짜와 같은 26일. 이토가 사망한 시각 오전 10시. 안의사의 사형이 집행됐어. 이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어떻게 됐을까? 동생들이 시신을 달라 요청했지만, 일본이 거부했어. 안 의사의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 까봐 그게 두려웠던 거야. 안의사의 유해는 여순 감옥 인근 묘지에 묻혔다고 해.
안의사 순국 5개월 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탄했어. 그날을 '경술국치'라 부르지. 2년 후, 안의사의 동생이 형님 유해의 일부를 찾았어. 동지들과 맹세하며 자른 손가락을 찾은 거야.
이건 당시 안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엽서야. 피로 적은 태극기, 거사 때 사용한 권총. 그리도 안의사의 잘린 손가락.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걸 보려고 찾아왔대. 그날의 맹세가 의혈항쟁의 상징이 된 거야. 이런 안의사의 뜻은 다른 애국지사들에게 이어져.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일왕 생일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나석주 의사, 조명하 의사 등 의혈 항쟁은 계속 이어졌어.
안중근 의사가 남긴 게 또 있어.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 '동양평화론'이야. 안타깝게 친필본은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 있어. 이토의 처단과 조국의 독립을 넘어 안의사가 바랐던 진짜 목표는 바로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였어.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그 시기에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 거야.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어.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집행을 미뤄주겠다는 일본의 약속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어. 그래서 동양평화론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은 거야.
▲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남겨진 사람들. 안의사의 두 동생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며 형님의 뜻을 이었어. 하지만 안의사의 두 아들은,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돼. 첫째 아들 우생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 준생은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떠났어. 그리고 30년이 지난 어느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기사 사진 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둘째아들 준생이야. 여기는 '박문사'라는 절이야. 박문사는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곳이야. 기사에는 "준생이 박문사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영전에 고개를 숙였다"라고 적혔어.
사람들은 준생을 변절자라고 욕하며 손가락질 했어. '호부견자'. 호랑이 같은 아버지 밑에서 개 같은 아들이 나왔다며 한탄했어.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준생에게, 안의사의 아내는 뭐라고 말했을까? 눈물을 흘리며 "고생했다"라고 말했대. 준생은 왜 사죄를 한 걸까?
일본은 남겨진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았어. 30년동안 끈질긴 협박과 회유가 있었대. 일본의 목적은 여전히, 30년이나 지났지만,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흉악한 살인자로 끌어내리고 싶은 거지. 그래서 그의 아들을 선전 도구로 이용한 거야. 그런 움직임은 이후에도 끊임 없었어.
"(일본은) 안중근에 대해서는 범죄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밝혀왔습니다."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
"우리는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세고 히로시게, 전 일본 관방 부장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13년이 지났어. 그의 일가 중에 독립운동에 힘쓴 분이 40여명,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만 17명이야. 그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소문을 해본 결과, 많은 분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계시는데 최근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계셔. 한국에 계신 분들 중에 안의사와 가까운 후손을 어렵게 만났어.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지사의 증손녀, 즉 안중근 의사의 조카 증손녀인 분이야.
"할머니는 항상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고생을 많이 하셨죠. 모아놓은 재산이 없다 보니까. 진짜 월급으로만 사셨거든요. 어려운 걸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셨어요. 조상분을 앞세워 도움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셨죠. 자랑스러워만 하셨거든요. 청렴결백을 항상 말씀하셨어요.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할머니 박태정 여사는, 안정근 지사의 며느리야. 평생을 청렴하게 살다가 최근에 돌아가셨어.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자랑스러운 마음만 품고 사셨다고 해. 이 분도 자신을 드러내는 걸 원치 않으셨어. 자칫 안중근 의사의 이름에 누가 될 까봐.
안중근이란 이름은 오늘날 모두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름이지만, 후손들한테는 자랑스러우면서도 무거운 이름이 아닐까.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 투사라고만 알고 있던 안중근 의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했던 교육가였고, 세계열강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던 외교관이었고, 독실한 신앙인이자,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사상가이기도 했어. 잘 안다고 생각했찌만 사실 몰랐던 이야기.
'동양평화론'의 마지막에는 "슬프도다 자연스러운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폭군이 되는 환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혀있어. 일제는 끝도 없이 침략전쟁을 벌이다가 결국엔 패망했잖아. 그리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됐지.
독립이 되기 전까진 술도 마시지 않겠다던 안중근 의사의 맹세. 이젠 독립이 됐으니 껄껄 웃으며 술 한잔 거하게 드셨을까. 마지막 유언처럼 하늘나라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르셨을까.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 서울 효창공원에 있어. 그 안에는, 독립을 위해 몸바친 분들이 많이 잠들어 계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봉분 옆에 안중근 의사의 묘도 자리하고 있어. 그런데 그 묘는 지금 비어있어.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거든. 언젠가 유해를 찾게 되면 이곳에 모시려고, 가묘를 만들어 둔거야. 독립이 되면 반장해 달라는 유언은, 113년이 지났지만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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