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수염과의 싸움질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수염은 남성에게만 있는 성징
한국인은 숱이 적은 축에 들어
콧수염·턱수염·구레나룻…
매일 면도하는 일 영원한 숙제
나이 들수록 수염에도 흰서리
화학·물리학 관여한 자연현상
요즘 와서 힘든 일 가운데 하나로 수염 깎기가 한자리한다. 여자들의 화장만큼이나 남자가 하는 면도(面刀)는 늙어 죽을 때까지 꼭 하는 영원한 숙제 같은 일이다. 그런데 ‘백수(白手) 과로사(過勞死)한다’라고, 코로나 기세가 좀 수그러드니 이런저런 모임이 잦아져서 쓸데없이 바쁘다. 보통 때는 집과 글방을 시계추처럼 오가니, 면도는 편한 대로 이삼일에 한 번 대충대충 해치웠는데, 자주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면도하기가 무척 귀찮고, 꽤 꺼려진다. 또, 면도할 때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대학 선배 한 분의 턱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긴 검은 털 한 올을 늘 떠올린다.
전기면도기는 살갗을 베일 일도 없는 데다 비누 거품을 바르지 않아 좋으나, 일반 면도기만큼 매끈하고 깔끔하게 면도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전기면도기로 대충 벌초(?)한 다음에,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일반 수동면도기로 끝마무리한다. 더할 나위 없는 도구인 면도기 덕에 누추하던 얼굴이 한결 말끔해지고, 덩달아 훨씬 젊어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수염(鬚髥)은 성숙한 남자의 입 주변이나 턱 또는 뺨에 나는 털이나 동물의 입언저리에 난 뻣뻣한 긴 털, 보리나 밀 따위의 낟알 끝에 가늘게 난 까끄라기 또는 옥수수의 낟알 틈에 가늘고 길게 난 털을 이른다고 했다. 사람 수염은 크게 콧수염(mustache), 턱수염(beard),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나는 구레나룻(sideburns) 수염으로 나눈다. 또한, 코로나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창궐하자 많은 나라의 의사들이 빳빳한 수염은 마스크의 효과를 크게 떨어뜨리므로, 남성들에게 면도하기를 권했다고 했던가….
수염이 자라는 속도는 하루에 평균 0.3∼0.4㎜ 정도이고, 수염이 무럭무럭 자라면 몸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면도를 해도 수염 자국(뿌리)이 피부 속에 남는데, 원래 검은색인 그 수염 그루터기(밑동)들이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하여 막 면도한, 숫기 넘치는 건강한 남성의 푸르죽죽한 얼굴 면도 자국이 여성들에게 아주 멋지게 보인다고 하던가.
수염은 보통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쯤부터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수염이 나는 모양은 유전적으로 천차만별이어서 콧수염하고 턱수염만 나는 사람도 있고, 털북숭이(털보)로 나는 사람도 있다. 수염은 나라마다, 또 민족에 따라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체모(體毛) 밀도가 낮아 수염 숱이 적은 축에 든단다.
그리고 옛날에는 조개껍데기, 석영(수정), 사금파리 따위를 깨뜨려 생기는 날카로운 날로 수염과 머리를 깎았다. 또한, 이가 맞는 조개껍데기를 맞물려 아예 수염을 뽑았다고 한다. 실제로 고대 잉카인들은 청동 족집게로 수염을 하나하나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양(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수염도 ‘부모가 물려주신 신체의 일부분(身體髮膚受之父母·신체발부수지부모)’이라는 인식에서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수염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가장 대표적인 이차성징(二次性徵, secondary sexual character)의 하나로, 남성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염의 역할은 남녀 구분, 보온, 외부 충격에 대한 보호 따위 말고도, ‘털집’이라 부르는 수염 모낭(毛囊, hair follicle)에서 여자를 꾀는 독특한, 일종의 성호르몬을 분비한다. 다시 말해서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와 모낭의 구조가 비슷하여 서로 닮은 수컷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유전적인 차이로 여성은 입과 턱 주위에 모낭이 남성보다 훨씬 적은 데다가, 수염은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 testosterone)에 의해서 성장이 촉진되므로, 호르몬 이상(異常)이 아니면 여성은 남성처럼 수염이 나지 않는다. 즉,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은 머리카락 성장을 억제하면서 수염 등 다른 체모는 자람을 촉진하며, 반대로 여성호르몬 에스트로젠(estrogen)은 수염의 자람을 억누른다. 그러나 여성이 늙어가면서(에스트로젠이 줄어들어) 남성화되어 부쩍 잔(솜털) 수염이 많이 돋는다.
수염이 빨리 자라는 사람은 날마다 수염과 싸움질을 해야 하는데, 어떤 이는 하루에 면도를 두 번이나 하기도 한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선거전 때 실제로 그랬음을 외국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면도는 할수록 털이 굵어진다거나, 더 많이 난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얼토당토아니한 이야기다. 즉, 털을 깎아줬다고 해서 절대 더 빨리 자라지 않으며, 또한 원래 한 가닥이 나던 모발 뿌리에서 두 가닥이 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갓 깎은 수염이 빳빳하고 거친 것은 끄트머리가 날카롭게 베였기 때문이고, 시간이 지나면 닳아서 가늘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늙으니 머리털, 턱수염, 콧수염, 코털에도 흰서리가 잔뜩 내린다. 노화 현상에 따라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하얘지는 것은 화학과 물리학도 관여한다. 노약, 쇠약, 영양부족 등으로 모근(毛根, 털뿌리)에 검은 멜라닌(melanin)색소가 술술 들어가 쌓이지 못하고, 또 털이 대통(죽통, 竹筒)처럼 속이 비어서 빛이 죽통 속 공기에 산란(散亂)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멜라닌색소가 부족한 데다 안개와 구름이 희듯이 털에 비친 빛살이 털 속의 공기에 난반사(산란, scattering)되어서 수염이나 머리칼이 하얗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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