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유학파' 김정은이 10년 전보다 퇴보한 이유는?

안정식 북한전문기자 2023. 1. 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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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의 마법에 빠져버린 김정은
북한이 지난해 말 노동당 제8기 제6차 전원회의를 열고 대내외 정책 방향을 밝혔습니다. 남한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고 핵탄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라는 등의 정치 군사적 내용이 주 관심사였지만, 전원회의 결과 보도를 보면 주목할 만한 부분들이 더 있습니다.
노동당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특히 김정은 총비서가 지금의 정세 하에서 북한을 어떻게 이끌어가려 하는지 경제적 측면에서의 방향을 밝힌 부분이 있는데, 김정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관련 문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총비서 동지께서는 우리 당이 국가창건으로부터 사회주의 건설의 전 행정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자립의 사상을 철저히 구현하며 패배주의와 기술신비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강하게 투쟁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낡은 사상 경향이 아직도 교묘한 외피를 쓰고 일부 경제일꾼들 속에 고질병, 토착병처럼 계속 잠복해있고 잠재하고 있는데 대하여 엄책하시었다.
전원회의는 아직까지도 남의 기술에 대한 의존을 털어버리지 않고 자력의 원칙을 흥정하려 드는 낡은 사상에 단호하고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객관적 환경에 빙자하면서 우리 사업을 방해하고 있는 온갖 그릇된 사상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전개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총비서 동지께서는 인민 경제의 성과적 발전에서 중요한 핵심 부문의 노동계급과 과학자, 기술자들이 다시 한번 1960년대, 70년대의 투쟁 정신과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의 난국을 우리 힘으로 타개해나갈 것을 열렬히 전투적으로 호소하시었다."

<북한 노동당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보도>

대외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외부 선진기술이 없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청산하고 자력갱생의 원칙으로 모든 것을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김정은의 주장입니다. 객관적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할 뿐 아니라 사상성이 부족한 것이라면서, 김정은은 1960년대 1970년대의 투쟁 정신을 소환했습니다.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해 경제발전의 동력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력갱생의 기치 아래 폐쇄 체제 안에서 경제발전을 시키라는 주문입니다.

10여 년 전 김정은은 달랐다?

김정은이 지금은 고립과 폐쇄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지만, 10여 년 전 집권 초기만 해도 김정은이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젊은 나이인 데다 어렸을 때 스위스에서 유학한 경험도 있는 등 서구사회에 대한 식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둔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리 북한이 개혁, 개방을 시도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여러 곳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실제로 김정은은 집권 초기 '변화'에 무게를 두는 듯한 모습을 일부 보여줬습니다. 2012년 7월 공개된 모란봉악단의 시범 공연 모습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미니스커트에 반짝이는 옷, 미키마우스와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곡이 등장한 모란봉악단 공연은 김정은식 변화의 신호탄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부인 리설주를 공식 석상에 등장시켰고 경제개혁도 추진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더 받아 갈 수 있는 자본주의적 인센티브 제도를 경제 현장에 일부 도입하는가 하면, 대외협력을 염두에 둔 경제개발구를 북한 전역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원산갈마관광지구와 마식령스키장 개발 등은 해외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둔 김정은의 야심작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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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모습

결과적으로, 이런 구상은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핵개발의 지속으로 인한 유엔의 대북 제재입니다. 2017년 ICBM급 미사일의 연이은 발사로 대북 제재가 대폭 강화되면서 외국기업의 대북 투자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코로나19 여파로 국경마저 2년 가까이 봉쇄하면서 대외무역도 급감했습니다.

김정은이 개혁 개방을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

하지만, 이 같은 외부적 환경으로만 북한의 고립과 폐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김정은이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생각했다면 핵개발의 대안을 검토하고 국제사회의 백신 지원을 받아들이면서 개혁 개방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김일성 일가의 왕국'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손자이자 김정일의 아들로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할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절대화해야 이른바 백두혈통의 후손인 자신의 권력도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절대화하려면 북한 주민들이 외부 사상에 물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외부정보를 습득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주민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강조해 온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와의 투쟁', 특히 2020년 말 제정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김정은식 사회통제의 결정판이었습니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서 남한 영상물을 유입, 배포하면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규정했습니다. 최근 들어 김정은이 강조하고 있는 후대 교육 강화, 이 또한 자라나는 세대들이 외부 정보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문입니다.

집권 초기만 해도 김정일과는 다른 '변화'를 시도했지만, 김일성 일가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김정은은 시간이 가면서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행사장에 입장할 때 끝없이 박수를 치는 사람들 앞에서 처음에는 어색한 표정을 보이던 김정은이 갈수록 박수를 받는 데 익숙해지거나 무표정한 모습을 보이는 데서 절대권력에 빠져 있는 김정은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
노동당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정은과 박수치는 사람들

문제의 본질은 북한 체제의 경직성

한반도 긴장의 근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반도 냉전 구조의 해체가 얘기돼 왔습니다. 아직도 기술적으로는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을 종전시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미 수교를 통해 북미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북한이 안보 위협에서 벗어나 핵을 포기할 수 있는 방안이고 이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긴장 완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미 간 외교관계가 맺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라고 해서 미국이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미 간 외교관계가 수립된다고 해도 미국은 북한의 인권 문제 등을 꾸준히 지적할 것이고,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선별적인 경제제재 등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의 경제제재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적대 정책을 버리지 못했다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안보 위협 해소 문제는 국교 수립이나 협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북한이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 얼마나 편입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미국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나라들은,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국이 아니라 해도, 미국으로부터 안보 위협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서 자유롭게 교류 협력을 추진하는 나라라면, 다시 말해 미국과 자유롭게 왕래를 하고 정보를 교류하며 사업을 하는 사이가 되면 미국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은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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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북한전문기자cs7922@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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