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SK와 나란히…최고 '영예' 거머쥔 K스타트업들 [CES 2023]
"화면에 아무 글자나 써보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느껴보세요."
5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베네치안 엑스포의 스타트업 특화 전시장 유레카 파크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CES2023에 참가한 1000개 이상의 스타트업 부스를 보기 위한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CES의 주최기관인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는 세계를 선도할 혁신적인 제품에 '혁신상'을 수여한다. 이 중에서도 최고 영예는 각 분야별로 1개 제품에만 주어지는 '최고 혁신상'이다. 올해 행사에선 전 세계 기업의 23개 제품이 최고 혁신상을 받았는데, 이 중 11개 제품은 국내 기업이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5개는 국내 스타트업이 내놓은 제품이다. 나머지는 삼성 LG SK 등 대기업의 몫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빛
'접근성' 부문에서 최고 혁신상을 거머쥔 닷인코퍼레이션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관에 부스를 차렸다. 부스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놓인 2대의 태블릿이 눈에 띄었다. 한 대는 평범한 '아이패드'였고, 나머지 한 대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태블릿인 '닷패드'였다.
기자가 아이패드에 '김'이란 글자를 쓰자 닷패드 화면에서 올록볼록 핀이 솟아올랐다. 손가락을 대자 점자를 만지듯 '김'이란 글자가 그대로 느껴졌다. 한 셀에 8개씩, 300개 셀에 숨어 있는 2400개의 핀이 올라오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블루투스 연동을 통해 태블릿에 나타난 그림과 글자들을 닷패드에 촉각 디스플레이 형태로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커다란 글자나 그림은 닷패드에 똑같이 표현된다. 많은 글자가 필요할 경우 닷패드 하단의 기다란 디스플레이에서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점자로 글자가 변환돼 나타난다. 회사가 세계 최초로 만든 이 촉각 디스플레이는 교육 현장이나 사무실에 도입하면 시각장애인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가격은 대당 수백만원 수준. 다소 비싼 탓에 우선 기업간 거래(B2B) 형태로 공급될 전망이다.
2015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난해 말 120억원 규모 시리즈B 투자도 유치했다. 인터베스트, 새한창업투자 등 벤처캐피털(VC) 뿐만 아니라 효성그룹도 투자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지하철역 키오스크에 촉각 디스플레이 솔루션을 공급 중인데, 향후 효성그룹의 키오스크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김주윤 닷인코퍼레이션 대표는 "점자 책은 비싼 데다가 쉽게 구할 수 없고, 음성 설명은 복잡한 주제에 대해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 지점을 해결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설명했다.
'꿈의 신소재'로 만든 라디에이터
포스코가 차린 '체인지업 그라운드' 전시관에선 그래핀스퀘어의 '그래핀 라디에이터'가 최초로 공개됐다. 그래핀스퀘어는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을 활용한 제품을 통해 가전 부문 최고혁신상을 수상했다. 그래핀은 탄소 동소체 중 하나로, 벌집 모양으로 연결돼 있는 소재다.
그래핀스퀘어가 내놓은 라디에이터에 들어가는 그래핀은 0.2나노미터 수준으로 매우 얇으면서도 구리 같은 소재보다 100배 이상 열전도율이 높다. 신축성도 있어 이론상 최대 20%까지 잡아당겨 늘릴 수 있는 소재다. 투명한 특성 덕분에 디스플레이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래핀스퀘어 부스에서 본 라디에이터는 Z자 형태로 접을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엔 그저 작은 창문을 접어 둔 것처럼 보였다. 투명한 유리 안쪽으로 손을 갖다 대자 뜨거운 열기가 손끝을 감쌌다. 직원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화상의 위험이 있다'고 말렸다. 앞 유리는 섭씨 75도, 밑 유리는 400도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난방이나 조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잠깐 물러서서 유리 뒤쪽을 바라보자 마치 홀로그램 형태로 모닥불이 타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Z자형 라디에이터 맨 위에 있는 디스플레이에서 반사돼 나오는 모닥불 영상이었다. 투명하게 만든 덕분에 이처럼 인테리어 소재로도 활용할 수 있다. 디스플레이에 바닷물 영상을 틀자 유리가 금세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회사가 지난해 내놓은 투명한 조리기구인 '그래핀 키친 스타일러'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발명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빵을 구울 때 양면을 동시에 데울 수 있고, 투명한 덕분에 조리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는 게 장점이다.
메타버스 음악과 블록체인 투표시스템도
버시스는 음악을 메타버스 공간으로 가져왔다. 수동적으로 노래를 듣거나,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음악을 '상호작용'하는 도구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회사는 '메타 뮤직 시스탬'을 통해 스트리밍 분야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전은경 버시스 이사는 기자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RPG 게임 같은 화면에 아바타가 나타났다. 노래가 시작되자 터치를 통해 아바타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다. 숲속이나 해변가를 거닐기도 하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풍선이나 피자 같은 '아이템'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 아이템은 이용자가 음악을 들었다는 일종의 증표로 수집하는 용도다. 지금은 게임 같은 가상 화면이지만, 향후 실제로 아티스트와 협업하게 되면 현실 뮤직비디오 화면에서 아바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화면 중간에 기분을 묻는 문구가 나타났다. 'Good'이라고 입력하자 배경 색깔이 바뀌고, 통통 튀는 효과가 추가됐다. 음악도 보다 더 흥겨운 리듬으로 변주됐다. 인공지능(AI)이 자동으로 기분에 따라 하나의 음악을 다양한 '무드'로 변환해준다고 한다. 채팅 기능을 통해 아티스트와 소통할 수도 있다. 아티스트와 소비자들이 소통하는 플랫폼으로 자리잡는 게 목표다.
이성욱 버시스 대표는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그는 "영상 미디어는 단순 영화에서 비디오 게임으로 발전해 '상호작용'할 수 있는데, 왜 음악은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발전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한 회사"라고 설명했다.
한양대 전시관에선 블록체인 스타트업 지크립토가 '사이버 보안' 분야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오현옥 한양대 교수와 김지혜 국민대 교수가 공동 창업한 이 회사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비밀 투표' 플랫폼을 개발했다.
'영(0)지식 증명' 기술이 핵심이다. 김형준 지크립토 이사는 "증명자가 검증자에게 비밀 정보를 직접 노출시키지 않고, 비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을 검증자에게 증명하는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이라며 "암호문의 내용을 몰라도 내용의 유효성은 검증할 수 있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지크립토는 블록체인 기반 비밀 투표 시스템을 적용하면 유권자는 공개되면서도 프라이버시는 확실하게 보호해 안전한 투표가 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력과 비용, 시간은 대폭 줄이고 투명성과 신뢰도는 높인다는 설명이다.
그밖에 2017년 문을 연 스타트업 마이크로시스템은 '스마트 시티' 분야에서 최고 혁신상을 거머쥐었다. 전자식 '자가 세정' 기능을 활용한 CCTV를 내놨다. 빗물 등으로 카메라 렌즈가 오염되는 상황에서도 고화질 감시가 가능한 게 특징이다.
라스베이거스=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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