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변신’에 대한 덧없는 집착, 회사를 망친다[박찬희의 경영 전략]
[경영 전략]
“기업은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끊임없이 변신하고 성장 발전해야 한다.”
경영학 책에 흔히 나오는 말이다. 거창한 말로 시작해야 점수를 받는지 학생들 답안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얼마나 빠르게 변하기에 늘 급변(急變)인지도 의문이고 여기에 계속 기업(going concern)이라는 회계처 리의 가정을 떡하니 기업의 사명이라고 덧붙이니 무지와 허영이 따로 없다.
사실은 오래전 일본 경영학 입문서에 나온 말을 생각 없이 옮기고 외우다 보니 당연한 말씀이 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자리 잡다 보니 그 무지와 허영이 국가 정책에까지 점염되고 있다.
쉽게 생각해 보자. 모든 개인 병원은 종합병원이 돼야 하고 스타트업 기업은 재벌로 성장해야 할까. 석기 시대 돌도끼를 만드는 사람도 온 부족이 밀어서 청동기 사업자로 변신시키자는 셈이다. 망할 회사를 우격다짐으로 연명하면 좀비 기업이 돼 세상에 해가 된다.
세상에는 주주들의 돈으로 경영자가 이것저것 일을 벌이며 자리를 보전하는 한심한 사업 변신도 무수히 많다. 무조건 기업은 변신하고 성장·발전해야 한다는 황당한 미신이 회사와 경영자를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한심한 현실을 몇 개의 사례로 살펴보자.
창업 경영자의 다양한 속사정
수학자인 A 교수는 인터넷 데이터 전송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사업화에 성공했다. 사업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투자도 성공적으로 받아 5억 달러의 지분 가치를 확보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장을 개발하고 관련된 사업 기회를 실현하려면 더 많은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A 교수에겐 버거운 일이고 개인적으로 너무 지쳐 좀 쉬고 다른 사업 기회를 생각해 보고 싶은 상황이다.
A 교수는 전문경영인을 선임하고 대주주로서 이사회에 간여하는 것이 낫다. 다른 기업에 지분을 매각하거나 일부 지분 가치를 지키면서 간여할 수도 있다. 대학에 돌아가 소중한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면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이 된다. 재충전하고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더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있고 이를 사업화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다. 흔히 말하는 변신과 성장·발전을 잘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영혼을 담아 인생을 걸고 창업해 몸도 마음도 지친 사람에게 달라진 사업 모델과 환경은 무섭기 짝이 없다. 어느 날 돌아보니 회사는 훌쩍 커졌고 사람들의 욕망과 사연이 엉켜 감당할 자신이 없고 애써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다면 창업 경영자에게 다른 대안을 마련해 주는 편이 낫다.
벤처캐피털 명함을 내건 악질 투자자가 창업 경영자를 몰아내고 회사를 탈취하는 사례가 있다 보니 창업 경영자의 역할 변화를 얘기하기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회사를 키우는 과정에서 있던 사연들을 파헤쳐 약점을 잡고 몰아대면 지분 가치를 지키기도 어렵다. 하지만 창업 경영자에게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주는 노력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서도 음해와 모략이 작동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투자자와 경영자의 건강한 긴장이 답이지 자신이 키운 회사를 뺏기면 죽는다는 생각으로는 회사도 경영자도 시들어 갈 뿐이다.
코끼리 등에 올라타야 한다면
K 사장은 석유화학 플랜트의 생산 효율을 높이고 유해 물질 배출을 줄이는 공정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생산 공정의 일부로 활용될 때 사업 가치가 완성되기 때문에 일정 단계에서 대기업에 인수시키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코끼리 등에 올라타야 나무 위의 과일을 따는 셈이다. K 사장은 기술이 검증되고 사업 모델이 안정되면 몇 개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협상에 나서 가장 좋은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대기업의 인수·합병(M&A)으로 회사를 빼앗기고 쫓겨난다는 생각은 이런 사업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창업 동지들의 이익을 지켜줘야 한다면 회사를 인수시키고 사업부나 자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 남을 수도 있다.
주식 교환으로 대기업의 상당한 지분을 손에 쥘 수도 있다. 계속 기업, 성장과 변신 운운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K 사장의 사업은 고만고만한 용역 서비스에 불과한 처지가 된다.
스마트폰의 부품이나 원천 기술을 가진 창업 기업은 삼성이나 애플 혹은 중국 기업과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사업의 속성 때문이다.
이때 대기업의 지분 투자는 상대의 배신을 막고 안정된 협력을 담보하는 ‘인질 교환’의 역할을 한다. 이를 놓고 대기업의 지분 탈취, 창업 기업의 굴욕적 투항으로 볼 안목이라면 차라리 소년 창업을 해 악덕 대기업을 집어삼키는 판타지 소설이나 즐기는 편이 낫다.
정책 지원이 좀비를 키우다
망할 회사는 당연히 망해야 하지만 창업 기업을 돕는 일은 ‘중소벤처 진흥 정책’이고 어려운 중소기업을 살리면 지역 경제 활성화, 노동자 보호가 된다. 약자를 돕고 경제의 뿌리를 살리는 아름다운 일이 된다. 얼마나 어려워야 월급쟁이 납세자보다 약자인지 모르겠지만 중소기업 진흥과 창업 지원의 생태계는(나쁜 대기업들 때문에도) 뭐라고 쓴소리 하면 욕먹기 딱 좋다.
국책 기관 연구원들이 모여 만든 스타트업 Q사의 사례를 보자. 3D 프린팅의 유행에 힘입어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했지만 어느새 범용 기술이 됐고 새로운 활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주변의 비슷한 회사들을 보니 연구소를 세워 각종 국책 과제를 따 먹고산다. 중소벤처 진흥, 소재 부품 혁신, 연구 역량 강화 등 발주 기관마다 아이템도 다양하다.
이왕 따라나선 김에 해외 연구자들과 협력 체계도 그럴듯하게 꾸미고 임직원들의 이력서도 연구원 버전으로 새로 수정해 국책 과제를 따 보니 신세계가 열린다.
이런저런 연구 과제로 30억원을 따내면 한 해 인건비가 나온다. 이 돈을 사업해 벌려면 매출을 300억원은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헛고생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렇게 2~3년 지나면 Q사는 나랏돈으로 연명하는 연구 용역 업체가 되고 만다.
시장과 투자자가 가치를 몰라주고 자금 여력이 없어 잠재력을 펴지 못한다면 지원 정책이 가뭄에 단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지원은 경쟁력 있는 기업에 돌아가야 마땅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기업에 대한 지원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나 마찬가지다. 중소 자동차 부품 업체인 Q사는 솔직히 미래가 없다. 중국 업체와 경쟁이 되지 않고 전기자동차 시대에 미래 기회가 없다. 하지만 거래 은행은 공장 부지 땅값이 버텨 주고 이자만 입금되면 대출을 연장해 준다.
은행의 대출 담당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대출에 간여한 사람들의 책임 문제가 나오고 관련 기관들도 고민이 커지니 사방이 적이 된다. 그래서 맡은 동안 사고 없기만 바란다.
그래야 지역 정치권은 고용과 상권을 유지하고 중소벤처부는 지원금에, 컨설팅에 일거리를 만들며 탈없이 지낼 수 있다. 물론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다른 더 좋은 회사를 돕는 데 쓰일 돈이다.
경영학 책에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팀을 이뤄 협력해야 잘된다고 적혀 있다. 릴레이는 협력의 다른 방식이다. 남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창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회사를 잘 키우고 체제를 갖추는 사람도 있다. 생명을 다한 회사를 피해를 줄이며 잘 정리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능력이 릴레이로 이어질 때 회사도 제대로 역할을 한다. ‘영속적 성장·변신’ 운운하는 미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면 제대로 성장할 회사도 망가뜨리고 나랏돈을 써 좀비 기업을 만든다. 어떻게 번 돈인데 마구 쓰나.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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