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안중근 의사, "위국헌신 군인본분"…그가 이토 히로부미는 의거한 진짜 이유는?

김효정 2023. 1. 6.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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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우리가 몰랐던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安(안)'의 전쟁 - 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라는 부제로 안중근 의사의 그날을 조명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순간에도 그는 끝까지 대한국 만세를 외쳤다.

그는 30세 토끼띠 안응칠, 바로 안중근이었다.

그는 일본의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이는 훗날 많은 독립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본 검사는 이토 공작을 왜 원수로 여기는가

그자를 원수처럼 여기게 된 이유는 많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

거침없이 구체적으로 15가지의 의거 명분을 밝혔다.

1905년 11월 17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분노한 안중근.

당시 그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아 떠돌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한 순간 아버지와 조국을 잃은 안중근.

그리고 그는 "조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라고 맹세하고 일본과 싸우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일본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러나 그는 승산 없는 싸움에도 끝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의 군이라는 의병부대를 만들어 참모 중장이 된 안중근, 하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8개월 후 러시아로 향한 안중근은 11명의 남자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르고 하나의 맹세를 했다. 손 무명지를 자르고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쓴 12명의 남자들. 이들은 의열 항쟁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것.

우연히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하는 일정을 알게 된 안중근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우덕순과 함께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거사에 앞서 안중근은 새 옷을 사 입고 이발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사진관으로 가서 사진을 남겼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 그는 직감적으로 한 남자를 향해 총 세 발을 쏘았고 이는 모두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했다. 그리고 당시 이토는 급히 기차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었다.

일본으로 넘겨져서 조사를 받게 된 안중근. 일본 검사는 이토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안중근은 "한국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죽었는가"라고 물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의거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은 채 기뻐했다.

일본은 안중근의 재판에 앞서 포승줄에 묶인 안중근의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는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에 불을 지폈다.

이에 일본은 안중근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갔고, 안중근 의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은 이후에도 그의 신앙심과 가족들을 볼모로 안중근을 흔들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은 안중근의 이토 의거로 자신들의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도 계획이 있었다. 그는 이토 의거로 온 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고 이를 기회로 일본의 침략 사실과 한국이 처한 현실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살인죄로 재판에 선 안중근, 그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했다. 재판이 계속될수록 안중근에게 말리는 재판, 이에 재판정은 급히 재판을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진술. 그는 "모두 내가 이토의 방침을 오해하고 있다고 한다. 오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토의 방침을 꿰뚫고 있다"라며 그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그는 "이토를 처단한 것은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의 일을 한 것"이라며 자신의 정당한 행위를 강조했다.

사형 판결이 내려진 순간, 안중근 의사는 기쁨을 내보였다. 그리고 이후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찾았다. 그의 의연함과 인품에 감탄해 그에게 글을 써달라고 찾아왔던 것.

안중근 의사를 찾아온 동생들은 그에게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전했다. 그의 어머니는 "오늘 이후 너는 신묘하게 형장에 나아가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내세에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너라"라는 담담한 이야기.

이에 안중근 의사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최후를 받아들일 테니 어머니는 안심하옵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사형 집행 직전 동생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난 천국에 가서도 우리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사형장으로 향했다. 사형 집행 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유묵을 남긴 안중근 의사.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일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토가 사망한 시각 사형당했다. 여순 감옥 인근에 묻힌 안중근 의사, 2년 후 동생이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맹세하며 잘랐던 손가락을 잘랐다.

의혈항쟁의 상징이 된 그날, 많은 이들이 그를 보러 왔다.

안중근 의사는 수감 생활 중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를 꿈꿨던 것.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을 미뤄주겠다던 일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30년 동안 끈질긴 협박과 회유가 계속되었고, 결국 그의 아들은 이토 히로부미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를 여전히 안중근 끌어내기에 이용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일가 중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건국 훈장을 받은 인물만 17명에 달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 자는 오늘날 모두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름이지만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러우면서도 무거운 이름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해 비어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독립이 되면 반장해 달라는 유언은 11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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