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절대자의 커다란 책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책을 쓴다”
아우슈비츠 비극이 준 충격 통해
인간의 삶과 절대자의 관계 탐사
“절대자는 궁극의 질문으로 있다”
질문의 책
에드몽 자베스 지음, 이주환 옮김 l 한길사 l 3만8000원
에드몽 자베스(1912~1991)는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가 낳은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랑스 시인이다. 자베스의 이름과 거의 동일시되는 작품이 <질문의 책> <닮음의 책> <환대의 책>인데, 이 대표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 <질문의 책>이 우리말로 나왔다.
자베스는 영국 식민지였던 이집트에 터를 잡은 유대인 은행가의 아들로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국적은 이탈리아였지만,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어권에 속해 프랑스어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일찍 시에 심취해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읽고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책을 탐독했다. 이집트 땅에서 이탈리아 국적을 지니고서 프랑스 언어와 문화에 젖어 산 것이 자베스의 어린 시절이었다. 자베스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책읽기와 글쓰기에 전념해 18살 때 <감정적인 환영들>이라는 첫 작품집을 펴냈다. 젊은 시절 자베스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이때까지 자베스의 유대인 정체성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 부르주아 작가를 유대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전후에 덮친 두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첫 번째가 독일 패망 뒤에야 알려진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이었다. 어떻게 문명세계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더 직접적인 타격을 준 것은 1956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해 일어난 제2차 중동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이집트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자베스는 평생 고향으로 알고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고서야 자신이 유대인임을 받아들였다. 아우슈비츠 비극도 실존적 체험의 문제로 되살아났다. 망명지 프랑스에서 자베스는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묻는 작가로 다시 세웠다.
<질문의 책>은 자베스가 그렇게 프랑스에 정착한 뒤 1963년부터 10년에 걸쳐 발표한 일곱 편의 연작을 묶은 책이다. 이 연작 가운데 처음 세 편이 ‘질문의 책’, ‘유켈의 책’, ‘책으로의 귀환’인데, 이 세 편이 책 전체의 제1부를 이룬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 <질문의 책>은 이 세 편을 옮겼다. 각 편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질문의 책’이자 ‘유켈의 책’이며 ‘책으로 돌아오는 자의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책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책, 그러니까 일관성 있는 문체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책과는 거리가 멀다. 운문과 산문 사이, 시와 소설 사이에 있는 것이 이 책이다. 희곡처럼 대화가 이어지고 소설처럼 주인공이 등장한다. 의미가 압축된 짧은 아포리즘이 있고 가상의 인물에게서 가져온 인용문들이 있다.
더 복잡한 것은 이 책을 이루는 서사 구조다. 이 작품은 사라 슈발이라는 여자와 유켈 세라피라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사라는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뒤 미쳐서 정신병동에 갇히고, 유켈은 사라를 대신해 세상을 떠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에 사라와 유켈의 사랑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유켈 세라피임이 드러난다. 유켈 세라피라는 작가가 사라와 유켈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 유켈 세라피는 실제의 작가 에드몽 자베스를 대리하는 인물일 것이다.
난해한 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도 독자의 능동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독자는 단어와 문장이 힐끗 보여주는 의미를 암호문을 풀듯 풀어내야 한다. 그런 수수께끼 가운데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이 바로 ‘책’의 의미다. 이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책’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인간들 각자가 살아가는 삶임을 알아볼 수 있다. 책(Livre)은 삶(Vivre)이다. 인간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각자가 한 권의 책을 써나가는 것과 같다. “얘야, 처음으로 내가 내 이름을 썼을 때, 나는 꼭 책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단다.” 이 인용문이 알려주듯이, 자기 이름을 처음 쓰면서 자기 삶의 책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라에게는 사라의 책이 있고, 유켈에게는 유켈의 책이 있다.
그러나 책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각자의 삶만 책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커다란 한 권의 책이다. 그렇다면 그 책을 써가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그 작가를 이 책은 ‘주님’이라고 부른다. 주님 곧 절대자가 쓰는 책이 이 세상, 이 우주다. 사람은 저마다 이 커다란 책의 우주 안에 있다. “나는 책 속에 있다. 책은 나의 우주요, 나의 나라, 나의 지붕이자 나의 수수께끼다. 책은 나의 호흡이자 나의 안식이다.” 이 세상은 ‘주님’이 써가는 책이다. 그 책 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각자 책 곧 삶을 쓴다. 그러나 주님의 처지에서 보면, 그 각각의 책들은 주님이 쓰는 책 안에서 주님을 통해 쓰이는 책이다. 주님이 각자의 삶을 통해 세상의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쓰는 책이 없다면 주님의 책도, 주님의 삶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실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님의 무수한 삶들 덕분이다.”
작가 자베스에게 이 책을 쓰게 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충격’이었다. 신이 있다면 아우슈비츠라는 절대적 폭력 앞에서 왜 침묵하는가? 이 물음은 궁극의 물음이어서 대답을 찾을 길이 없다. 이 책은 절대자가 그런 물음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대자는 오직 윤리적 물음의 극한으로만 존재한다. 절대자는 궁극의 질문이며 이 질문의 메아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으며 우리의 삶 곧 우리의 책을 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이 존재할 따름이다. 주님과 인간을 통하여 펼쳐진 책 속에서.”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없다면 주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이 없다면 인간도 없을 것이다. 인간과 주님이 함께 써가는 것이 이 세상의 책일 것이다.’ 그 책에는 명확한 답이 없지만 우리 각자는 답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그 나아감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르고 주님에게 이른다. 그것이 ‘책으로 돌아옴’이다. 그 돌아옴은 다시 떠남을 기약한다. “책은 영원히 다시 시작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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