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34) 수렴청정

관리자 2023. 1. 6.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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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아들 사또 자리에 앉혀
‘상왕 사또’ 행세하며 백성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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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사는 원래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긁어모아 고을 최고의 갑부가 됐다. 그러고도 가을이 되면 나락이 산더미처럼 쌓여 새 곳간 짓기에 바빴다. 보릿고개가 되면 밭뙈기 한두 마지기로 온 식구들 목줄을 걸고 있던 빈농네는 곳간 양식이 떨어진다. 이 진사를 찾아가 보리쌀이나 콩 몇말을 빌려 가 식구들 입에 풀칠해서 목숨은 이어가지만 가을이 돼도 장리쌀 빚을 갚을 수는 없다. 결국 담보로 맡겨뒀던 땅문서는 속절없이 이 진사 다락으로 들어간다.

이 진사가 불뚝 배를 흔들며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를 지나 첩 집으로 걸어가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다. 이 진사는 5년 전에 상처해 홀아비가 됐지만 후처를 들이지 않고 돈을 퍼부어 여기저기 첩살림만 차렸다.

돈이 최고라 굳게 믿었던 이 진사가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유 없이 현청에 소환돼 형틀에 묶여 곤장 10대를 맞고 이방의 중재로 오백냥을 내고 풀려났다. 제아무리 부자도 권력 앞에는 맥을 못 춘다는 걸 몸소 터득했다. 진사 벼슬도 돈을 주고 샀는데 아들에게는 제대로 큰 벼슬을 사주기로 도박을 했다. 농사짓던 열일곱살 삼대독자 중헌에게 훈장을 붙여 급조로 천자문 정도만 머릿속에 구겨 넣고 이 진사는 돈 보따리를 싸 들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매관매직이 판을 치던 썩은 시절이라 어렵지 않게 사또 자리를 샀고 이 진사 아들은 갑자기 사또가 돼 강원 정선으로 부임했다. 사또 자리를 사느라 재산이 반쯤 날아갔지만 그까짓게 대수랴, 긁어모으면 되지!

정선이란 곳은 척박한 첩첩산중이라 고을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팍팍한데도 동헌 마당의 곤장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이 진사는 상왕 사또가 돼 동헌 안방에 발을 치고 앉아 수렴청정했다. 대청에 앉은 사또 아들에게 귀띔했다.

“이놈아, 이방을 불러 이 고을 부자명단을 가지고 오라 해라.”

권력의 달콤한 맛을 만끽했지만 꿈 같은 세월이 석달도 가지 않았다. 암행어사가 들이닥쳐 사또 중헌은 한양으로 압송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이 진사는 야반도주해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갔다.

삼대독자 아들이 곤장으로 죽었으니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에 설상가상 대(代)가 끊어질 판이다.

“내가 죽어 저승에서 조상님을 만나면 뭐라고 둘러댈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술로 살았다.

어느 날 밤 그날도 밖엔 함박눈이 펄펄 온 천지를 하얗게 덮는데 사랑방 보료에 쓰러지듯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바로 그때 머리를 때리는 번갯불! 이 진사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루터로 내달렸다. 그가 달려간 곳은 나루터 버들주막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밤중에 진사 어른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술상 하나 차려 오게. 청주 한 호리병에 너비아니도 굽고.”

“어머, 오늘 밤은 통이 크십니다.”

이 진사는 뜨끈뜨끈한 안방 벽에 기대어 앉고 주모가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 왔다.

“청매는 어디 갔는가?”

“마실 갔지요.”

열여덟 청매는 주모의 외동딸로 미모가 빼어났다. 이 진사는 어렴풋이 소문을 들었다. 죽은 삼대독자 외아들이 청매에게 반해서 버들주막을 들락날락했다는 걸. 혹시라도 청매에게 씨를 뿌려 놓지나 않았는지, 이 진사는 희미한 가능성을 찾아온 것이다.

청매가 들어왔다. 주모가 부엌으로 간 사이 이 진사는 엽전 한 움큼을 청매 치마에 쏟았다. 청매 눈이 휘둥그레져 이 진사 술잔에 술을 따랐다.

“청매야, 너도 우리 중헌이 생각나지?”

청매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이 진사도 울면서 “네가 내 며느리가 됐을 텐데” 하며 눈물지었다. 능구렁이 주모가 눈치챘다. 이튿날 또 이 진사가 주막에 갔을 때 청매는 귤을 먹고 있었다. 이 진사는 무릎을 쳤다. 마침내 주모가 이 진사와 담판을 벌였다.

“청매가 진사 어른의 손자를 낳으면 진사 어른은 대를 잇지만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청매 앞날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배 속의 손자값은 자꾸 올라 삼천냥에 합의해 청매 모녀는 돈 궤짝을 받았다. 이 진사는 눈만 뜨면 주막으로 달려와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청매의 배를 뚫어지게 봤다.

밤만 되면 주모는 옷을 벗은 청매의 배에 광목천을 한 겹씩 둘러 배가 조금씩 불러 보이게 했다. 어느 날 주막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청매 배를 감싼 광목천까지 다 풀어버린 주모와 청매는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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