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이야기를 세상 곳곳에 퍼뜨릴 수 있도록 [함께 본다, 그림책]

2023. 1. 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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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히드 카제미의 '셰에라자드'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그림책 '셰에라자드' 주인공은 첫 장면부터 공책과 펜을 손에 쥐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이야기꾼의 면모를 드러낸다. 모래알 제공

어린이든 어른이든 우리는 늘 재미난 이야기에 목이 마르다. 내 주변 어린이들은 조금이라도 지루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말을 늘어놓을라치면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더 재밌는 거 없어요?” 하고 바로 반응한다. 어른들도 소설이든 드라마든 게임이든 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에서 흥미로운 서사를 계속 찾으면서도, 결국은 오래되고 보편적인 진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결말에 안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노승영 옮김, 민음사, 2014)에 따르면, “픽션은 삶의 거대한 난제를 시뮬레이션하는 강력하고도 오래된 가상현실 기술”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고난도 임무를 맡은 조종사가 모의 비행 장치를 이용해 연습하듯, 인간은 이야기로부터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니 삶이 힘들수록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상상의 힘을 발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무섭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에 맞서서 한 인간을 바꾸고 결국은 세상을 바꾸어내는 작고 약한 사람 이야기는 시대와 장소를 통틀어서 늘 사랑받는 소재이다. 성난 왕에 맞섰던 영웅들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매일 밤 젊은 여자들을 신붓감으로 데려다가 아침에 죽여버리던 술탄을 오직 이야기의 힘만으로 사로잡아 폭정을 멈추게 했던 ‘셰에라자드’는 좀처럼 잊기 힘든 이야기꾼이다.

어린 셰에라자드는 상상 속에서 화난 왕을 만나 왕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준다. 모래알 제공

이란 출신으로 테헤란에서 미술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작가 나히드 카제미의 그림책 '셰에라자드'는 이 놀라운 이야기꾼을 현대의 인물로 되살려냈다. 호기심 많아 보이는 동그란 눈, 다부진 표정을 만들어내는 짙은 눈썹, 곱슬곱슬한 더벅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아이 셰에라자드는 첫 장면부터 이미 공책과 펜을 손에 쥐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셰에라자드는 단지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온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데, 그 비결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오로지 이 어린 이야기꾼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셰에라자드 앞에 슬픈 얼굴로 공원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나타났을 때, 무슨 일이 있는지 사연을 들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소년이 살던 나라의 왕은 원래 자상하고 공평한 사람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를 둘 다 잃은 뒤에는 다른 사람들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두 눈으로 볼 수가 없다면서 모든 즐거움을 금지시킨다. 꼭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만이 폭정은 아니다. 웃음이 사라진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왕처럼 화를 내고 포악해진다.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해 왔지만, 소년은 웃을 수가 없다.

셰에라자드·나히드 카제미 지음·김지은 옮김·모래알 발행·92쪽·1만6,800원

90쪽가량의 책 후반부에서 어린 셰에라자드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사명감을 마음에 품는다. 소년은 어떤 마음일까, 그리고 왕이 되는 건 또 어떤 기분일까를 느껴보면서 상상 속에서 화난 왕을 찾아가는 모험에 나선다. 옛이야기 ‘천일야화’처럼 셰에라자드를 만난 왕은 이야기에 빠져든다.

중요한 것은 셰에라자드가 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계속되자 어느 순간부터 왕은 왕관도, 왕좌도, 화려한 옷도 다 내려놓는다. 앞에서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사람들처럼 왕 또한 바닥에 팔을 괴고 누워서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사람이 된다. 이제 셰에라자드는 그다음 단계로 타인의 두려움과 슬픔, 아픔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행복한 왕이 다스리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야기에 푹 빠지면 감정이 움직이고, 그럴 때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작가의 고향인 이란을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정,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식에 마음 아픈 나날이다. 이런 사연들을 공감의 언어로 기록하고 퍼뜨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한다. 분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지 않도록, 행복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퍼뜨리는 일을 새해 다짐으로 삼아 본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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