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84] 으뜸이 아니면 ‘가장’이 아니다

양해원 글지기 대표 2023. 1.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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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쩡하게 매운 날이었다. 겨울 산 오를 엄두는 나지 않고, 눈 덮여 뽀얀 속살이나 탐하는데…. 김새게 멀건 콧물이 샜다. 차 안에서 아쉬운 대로 집은 물휴지는 돌덩이. 춥긴 춥구나. 하긴 맥주병이 심심찮게 얼어 터지고 소주병도 그랬음에랴. 그런 추위를 ‘혹한(酷寒)’ 정도로 불러서는 요즘 어림없다. ‘초강력 한파’ ‘최강 한파’도 모자라 ‘수퍼 울트라 추위’쯤 써야 성에 차겠지. 말 값어치가 갈수록 떨어지니 꾸미는 말이 덕지덕지. 이러니 무엇이 으뜸인지 헛갈린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지난달 31일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6위에 선정했다.’ 10위도 아니고 6위요 일본을 제친 터라 으쓱할 법한데, ‘가장’이란 표현이 켕긴다. 여럿 가운데 으뜸가는 상태를 뜻하는 말 아닌가. 강력한 여러 나라 중 하나로 꼽혔으니 ‘아주(매우, 대단히)’ 따위로 써야 옳다.

‘가수 아이유와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정국이 미국의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이 뽑은 역대 가장 위대한 가수 200에 이름을 올렸다.’ 역시 위대한 무리에 들었으면 그냥 ‘위대한 역대 가수 200′ 해야 하는데 ‘가장’을 쓰는 바람에 어색해졌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문에 답이 있다. ‘The world’s most powerful countries’ ‘the 200 greatest Singers of All Time’의 ‘most’ ‘the –est’를 곧이곧대로 ‘가장’으로 옮겨 버릇한 것이다. 영어에서는 최상급으로 표현해도 실제 최고 자리가 아니면 우리말로는 ‘몹시, 매우’ 등으로 바꿔야 옳건만. 그러니 사전에도 ‘보리는 인류가 재배한 가장 오래된 작물의 한 가지이다’ 같은 예문이 버젓이 오른다.

봉건적 ‘가장(家長)’의 권세야 시들어 마땅하지만, 으뜸 상태를 나타내는 순우리말 ‘가장’의 위엄마저 흔들림은 안타까운 일. 굳이 외국어 굴레를 쓸 이유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대한민국, 말과 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할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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