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난쏘공, 조세희, 침묵의 뿌리
숲을 ‘후드려’ 팰 기세의 소나기가 그친 뒤 그래도 세상을 마지막으로 어루만지는 건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거의 동그란 물방울 하나이듯, 어쩐지 속은 줄도 모르게 속아서 그 무엇에게 진 기분으로 울적할 적에 오갈 데 없는 마음을 토닥여주는 둥근 문장들이 있었다. 그 책이 풍기는 진한 여운은 어둑한 어둠 넘어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과 함께 시골에 두고 온 내 어린 시절 같아서 아주 가끔 시선을 멀리 열한 시 방향의 공중으로 던지게 하였다. 그럴 때면 목구멍이 조금 간지러워지고, 나 같은 조무래기마저 피해 도망가던 송아지 생각도 났다.
<난쏘공>을 빚어낸 작가의 부음을 듣고 저 그윽한 문장만을 인용하여 짧은 글 한 편을 짓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참 아껴가며 읽었던 그 책을 다시 꺼내고, 선생의 사진에 관한 글도 찾아 읽는다. 아, 혀끝에 번져오는 묵직한 통증.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한다.
“미술가가 꿈속에서 빛깔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작가는 꿈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많은 말들과 만난다. 그해에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내가 써야 할 말들이 끝없이 이어져 나와 정말 때에 어울리는 나의 말들아 너희도 이제 잠을 좀 자고 내가 깨어나 일할 때 차례로 일어나 나와라 부탁할 정도였다. 나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지만 깊이 잠들 수 없었다. 어떤 말들은 끝내 잠자지 않고 다가와 나를 잡아 흔들었다. 나는 빨리 써 달라고 보채는 그 말들을 머리맡 빈 커피잔에 넣어 받침접시로 눌러놓은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침묵의 뿌리, 20쪽, 열화당)
간밤에 눈이 또 왔다. 심학산 아래 냉골의 쪽방에서 혼자 뒹구는 날이 많다. 떡국을 끓이려는데 분홍색 그릇 하나가 새삼 눈으로 툭 들어왔다. 어라, 이건 어머니의 손때 묻은 오래된 김치보시기가 아닌가. 설설 오는 눈은 그 뿌리가 명확하게 하늘이고 그곳의 근황이 얼마간 묻어 있기 마련이다. 무슨 말씀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은 눈을 한가득 분홍그릇에 담아 머리맡에 놓았다. 눈은 물이 되고 물은 또 먼지를 업겠다 흩어지겠지. 밤마다 속삭이며 야위어가는 물그릇. 냉방에서도 머리맡이 후끈해지고 나는 모처럼 색깔 있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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