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토끼와 오펜하이머

기자 2023. 1.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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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96. 올해 최고의 기대작 <오펜하이머>(사진) 개봉까지 남은 일수다. 영화팬들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새 영화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놀런의 영화는 데뷔작부터 전작 <테넷>까지 화제를 선점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가 살갗에 기억을 문신처럼 기록하며 아내 살해범을 쫓는 <메멘토>의 싹수는 할리우드 안에서 영화적 표현 영역을 확장하며 만개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상상력과 규모에 철학적 주름을 새기면 놀런의 영화가 된다. 매번 둔중한 영화적 발자취를 남기는 놀런의 12번째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20세기는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발발한 격동의 시대였던 만큼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특히 천재 과학자들이 폭발하듯 등장하였다.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존 폰 노이만, 엔리코 페르미 등 슬기로운 두뇌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2차 대전 전후는 과학자들에 의한 사피엔스의 전성기였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탄을 만들 수 있었던 환경과 비전을 제공한 시대였다.

미국은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결성한다.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45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핵실험지의 암호명 ‘트리니티’는 오펜하이머가 애송한 시에서 따왔다. 암호명을 붙일 때까지 오펜하이머는 불우할 앞날을 예감하지 못했다.

1945년 7월17일, 최초로 핵폭탄이 터졌다. 3000m 높이로 치솟은 섬광은 태양 몇 개의 밝기였고, 32㎞ 떨어진 곳까지 열기를 전달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몇 사람은 폭소했고, 몇 사람은 울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말을 잃었다.” 오펜하이머는 전율했다.

웃음을 터뜨린 사람들은 원자탄을 지체 없이 실전에 투입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지켜본 오펜하이머는 괴로웠다. 우려대로 소련을 필두로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며 세계는 공멸의 대결 구도로 재편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모두 원자탄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사이가 좋았던 리처드 파인먼은 핵무기가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긍정했다. 커다란 전쟁 대신 냉전이 시작되었으니 오펜하이머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의 위험은 세상을 위태롭게 했다. 몇 년 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을 막기 위해 맥아더가 원자탄 투하를 건의했었고, 1962년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고조되어 핵무기 사용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이 핵공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영화의 원작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는 윤리적 성찰과 지성이 결여됐을 때 과학이 초래할 암울한 세계에 대한 과학자의 고뇌가 눅진하게 기록돼 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면서 매카시 광풍의 한가운데서 고초를 겪는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소련 스파이라 몰리는 굴욕에도 객관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핵의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냉전 시대 잠수함의 토끼 역할을 맡은 지성인이었다.

북한이 핵 위협의 빈도와 강도를 높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호기롭게 강 대 강 전략을 피력했다. 미국과 핵에 대한 공동연습을 할 것이라 발표했으나 바이든은 합의한 바 없다며 가볍게 날려버렸다. 북핵 주제로 열릴 미·일 정상회담에서 보란 듯이 한국을 패싱했다. 어지럽다. 국민의 안전에 속수무책인 현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다.

곳곳에 잠수함의 토끼가 필요한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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